십자가 복음의 실체의 저자
니고데모
2025.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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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복음의 실체 정리란
이 글은 성경을 통달해야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정확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어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필자도 아주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1 기초 진리(사랑의 진리)
- 나는 없고 오직 예수 하나님과 예수님과 내 안의 성령이 사랑으로 존재합니다. 그 사랑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며 간구하는 자에게 베푸는 사랑이며 간구한 자가 기억하는 것이 사랑의 진리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욕심이고 사랑은 아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시로 시작하고 인간은 의심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계시받은 진리로 씨뿌리는 비유에서 씨이며 복음이며 성경을 푸는 열쇠입니다.
- 요한복음은 요한계시록 10장에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에서 요한복음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요한계시록과 연결어 해석을 해야 합니다.
-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했으니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즉 사랑의 진리로 성경을 풀어야 합니다.
- 예수님은 기도와 구제를 은밀히 하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기도는 은밀하게 하셨는데 구제는 다 보여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 은밀히 한 것이 아니니 예수님이 틀린 것인가요? 아닙니다. 구제를 은밀히 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요한복음 8장) 간음한 여자를 데리고 와서 정죄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다름대로 무엇인가를 깨닫고 열심히 다른 사람들이나 이단이나 교회나 정죄를 합니다. 이 요한복음의 말씀은 남을 정죄하려면 자기가 의인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니면 계시 받은것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의인이 아니므로 자기도 스스로 죄를 깨닫지 못하고 다른 의인이나 선지자가 깨닫게 해주어야 죄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1.2 참 이스라엘사람 성도란
요한복음 1장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알리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냐고 말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다윗왕 같은 메시아가 와서 로마를 물리쳐 주기를 바랬는 데 나다나엘은 선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참 이스라엘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부자 청년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말을 했다고 했는데 왜 부자 청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야기 했을까요? 부자 청년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시편 1편에는 복 있는 자는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복 있는 자 중에 율법을 묵상하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묵상하는 자 중에 복 있는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초등선생이므로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면 탐심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읽고 무엇인가를 알아 성경을 아는 척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무엇인가를 깨달아 자기가 대단한 것을 안 것처럼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고 정죄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거짓선지자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좁은문이라는 말이 좁은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거의 없다는 말이니 거짓선지자가 많다는 말도 거의 다 거짓선지자라고 말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참 이스라엘인은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합니다. 즉 8복에 해당하는 자들은 주야로 성경을 읽고 마음이 가난해지고 애통하게 되고 마음이 청결하게 되고 화평께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아가 오면 모든 것을 알게 해준다고 알고 있습니다.
솔로몬도 선악을 올바로 판단할 지혜를 달라고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참 이스라엘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대단한 간증이 있다 해도 모두 진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참 이스라엘인 성도가 되려면 나다나엘처럼 선한 것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보고 자기가 죄를 깨달은 자는 선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것을 찾는 자에게 예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선으로 보아야만 성경을 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진리는 사랑이고 말세에는 사랑이 식어진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죠, 말세에 사랑의 진리를 전하는 데 알아듣는 사람이 없으니 사랑이 식은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드물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한가지 말을 하면 성경에 나실인 서원에 대해 나옵니다.
만수기 6장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3.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4.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5.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절대로 그의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의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6.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7.그의 부모 형제 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말미암아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의 머리에 있음이라 8.자기의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
마실인의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까다로은 이유는 너희는 나실인 서원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율법을 보고 죄를 깨달아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처럼 나실인 서원을 보고 ”나는 절대 나실인이 안되니 하나님께서 나실인을 보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자 = 복있는 자 = 참이스라엘인 = 마음이 가난한 자 = 나실인 = 하나님의 자녀까지 연결 됩니다.
마지막으로 죄인은 재판장이 사랑이 많아서 가능한 약한 판결을 주시기를 원할 겁니다.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고 방청객이라고 생각하면 재판장이 죄인을 엄정하게 심판하기를 바라겠죠. 즉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 진노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바리새인들이고 구경꾼들입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의 멸망을 구경하다가 소금 기둥이 되고 노아 홍수때의 방주는 창문이 닫혀있어서 심판을 볼 수 없었습니다. 남의 심판을 구경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같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단에 뿌린 사건이나 실로암 망대공사에서 죽은 사람들을 구경하지 말고 너희도 회개해야지 회개하지 않으면 같은 심판받는 다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은 자는 사랑의 진리도 깨닫게 됩니다. 즉 사랑의 진리도 모르면서 자기가 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위선자이며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을 구하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성경을 아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은 남자는 여자들을 보고 너희가 성경을 읽어봐야 얼마나 알겠냐는 생각을 보통 할겁니다. 그럼 하나님은 남자들을 보고도 똑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1.3. 선이란 무엇인가?
선을 알아야 죄를 아는 것입니다. 죄를 안다고 선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가장 기본인 선을 알아야 하나 아는 사람이 없으니 성경을 한글자라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라고 하면 유치원생도 아는 말입니다. 성경은 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완전한 선을 보아야 합니다. 장성한 사람이라면 선한지 증명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고 로마서 12장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전포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할 때 기습하면 이길 가능성이 크나 선전포고를 하면 적이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강대국이 약소국을 향해 선전포고는 의미는 없습니다. 기습하는 것보다 선전포고를 먼저 하는 것이 선하나 그것만으로는 선이 아니고 상대방이 준비되었다고 할 때 들어가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낼 때에 먼저 선지자에게 말씀하시고 보내셨습니다. 아모스 3장에는 7절“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말씀하지 않으시면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대로 된 것입니다. 또한 말라기 3장에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간구할때에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즉 사람들이 준비가 되었을 때에 보낸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선지자들을 봅시다. 예수님을 전한 선지자는 모세, 다윗, 이사야가 대표적입니다. 모세는 지도자, 다윗은 왕, 이사야는 왕족입니다. 최소한 왕족 이상이 예수를 세례요한을 봅시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보내시긴 했는 데 세례요한은 다른 선지자들과 다릅니다. 태어날 때부터 신비한 일이 있었고, 유대에 널리 펴졌습니다. 또한 제사장의 아들이며 들에서 살았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선지자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즉 하나님도 인정하고 사람들도 100% 인정할만한 선지자를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낳은 자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선합니까? 여러분은 선이 무슨 뜻인가를 생각했을 것 같은데 모든 것은 말과 행위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인정할만한 선지자를 세웠기 때문에 유대인 모두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례요한이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할말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람이 알만한 것을 통해 계시하시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믿지를 않는 것이 사람입니다.
죄는 과녁의 정중앙에 맞지 않으면 죄입니다. 100%가 아니면 죄입니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는 100%선한 것을 믿지 않는 겁니다 100%선을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이 사람들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겁니다.
1-4. 원죄의 진리
- 원죄는 무엇인가? : 아담이 여자의 말을 들은 것이 원죄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 원죄가 왜 이어졌는가? 태중부터 여자에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자식도 유대인이라고 하죠. 어머니에게 태중부터 교육을 받으니 유대인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으로 길러지는 겁니다. 다윗도 자신이 태중부터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태중부터 마리아의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주는 대로 먹고 따로 교육이 필요 없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그 증거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살 때 성전에 계신 예수를 보고 마리아가 꾸짖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가 성전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내 능력을 보이라고 예수님께 강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이적을 보였습니다. 나중에는 미쳤다고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이렇게 여자는 남자를 가르치려고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도 십자가 아래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한복음 말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말씀하시는데 도대체 무엇을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이 말씀은 마리아와 요한이 순종한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즉 여자인 교회는 십자가를 보아야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의 핵심이 원죄였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을 쓴 이유도 이 십자가 복음을 완성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쓴 겁니다(계시록 10장)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왜 완전히 행하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사라의 말을 듣고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던 것입니다. 원죄와 똑같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언약을 주셨으면 믿는 자는 언약을 이루시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니 하나님께 간구해야 행하는 데 아브라함이 간구하지 않으시니까 100세나 되어 하나님이 이루셨던 것입니다.
1.5 십자가 복음의 실체
율법은 구제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내 모든 것으로 구제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 모든 말씀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모르니 아주 중요한 순간을 그냥 넘어갑니다. 모든 말씀이라고 했고 하나님은 말씀이시니 하나님이 모든 것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구제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아닙니다. 간구하는 자에게 베푸는 사랑이어야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완성해야 율법이 완성입니다. 기본적으로 십계명은 사람이 구하지도 않았는데 주신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진리의 사랑은 간구하는 자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은 후 스스로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 율법 지키기, 세상왕되기,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 왕이 다스려주기를 바랬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데 사람을 더 원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무서워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고통받다가 하나님께 간구하여 모세를 통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광야 생활을 통해 원망과 배도로 1세대는 갈렙과 여호수아를 빼고 다 죽습니다.
사사기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시대에서는 사사가 있었지만, 왕이 없으므로 자기소견대로 행하다가 입다는 자기 딸을 번제로 드리기도 하고 온 이스라엘이 베냐민 지파를 멸족시킬 뻔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을 다스릴 왕을 세상 왕을 달라고 합니다. 선악을 옳게 판단할 왕을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 율법을 올바로 알지를 못하고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니까 왕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왕을 주십니다. 그러나 세상 왕들은 이스라엘을 더 배도의 길로 인도하고 이스라엘이 망하게 합니다. 그래서 다윗 같은 세상 왕 적인 메시아를 바라게 됩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성령이 오시면 책망을 하신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 이하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이 말씀들을 모르면 성령이 없는 것입니다.
즉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시고, 의가 무엇인지 알게 하신다고 하시고 심판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신다고 합니다. 즉 죄는 선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즉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완전하게 알아듣도록 했음에도 유대인의 왕을 죽였으니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다른 죄는 변명을 하겠지만, 자기가 바라고 바라던 그 왕을 죽인 것이니 완전한 죄라는 것입니다. 의에 대해서는 먼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를 의로 여기셨다고 했으니 십자가에 믿음을 보이는 장면을 찾아야 합니다. 즉 마리아 요한이 말씀이 순종하는 장면이 의를 말하는 것으로 교회를 세우는 일을 말합니다. 심판에 대해서는 세상왕 즉 십자가에는 다윗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에 분명히 유대인의 왕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시편 22편을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시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십자가에서 다윗왕이 죽는 것입니다. 세상 임금이 죽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세상왕 예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해야 하는 데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세상 왕으로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옛 사람들이 바라던 그 세상 왕을 자기의 손으로 심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모세가 장대에 놋뱀을 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내가 원하고 소망하던 것을 스스로 죽여 없애게 된 것입니다.
3. 결론적으로 우리의 옛사람을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더 이상 우리가 바라던 것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의 소망을 죽여버린 것으로 더 이상 이 세상의 것을 하나님께 바랄 것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기도할 것이 없어진 것입니다. 자기의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것입니다. 절망입니다.
더 이상 스스로 선악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여기까지가 구제입니다.) 죄를 이제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죄를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진짜 죄는 이제야 깨달은 것입니다. 왜냐면 완전한 죄를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부활이 사실인 이유는 절망에 빠진 참 이스라엘이 다시 소망을 가지려면 예수께서 부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에게 부활을 보일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은 절망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제 산 소망을 받은 자는 예수께서 약속하신 하늘의 것 즉 성령을 간구할 수밖에 없고 오순절에 이르러 성령을 받고 그 성령을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언약하신 것이라 이스라엘의 마음에 새겨진 것이 아니고 돌에 새겨진 것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죽었다 살아난 자들이 스스로 간구하여 얻은 언약이므로 마음에 새겨진 것입니다. 자신이 간구한 것이니 간구한 자가 기억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꿈이야기를 하자 야곱이 호통을 칩니다. 그리고 야곱이 그 꿈을 기억합니다. 꿈은 잊어야지 하나님이 이끌어 가십니다. 내가 꿈을 잊지 않겠다고 하면 그 사람은 예수가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새 언약이 새겨지는 과정이 자기 부인이고 죄사함이고 구원이고 거듭남입니다. 성경의 시작이고 결말입니다.
(히브리서 5장)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성령이 선악을 판단하게 해주시는 겁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고 모든 신학의 기초로 이 말씀을 깨닫는 사람이 없으니 모든 신학이 우상숭배나 다름이 없는 겁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들인 겁니다. 즉 선을 구한 참 이스라엘인이고 선을 전하는 자가 참 선지자입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모든 간증이나 모든 지식은 이 진리 앞에 무너져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이며 거듭남이고 성경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듣고 자기부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자기도 그렇게 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강도나 도적입니다.
강도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옆에 매달려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십자가 복음의 핵심이며 진리이며 결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