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핵심: "주님, 제가 가해자입니다." 회개와 용서를 통한 회복과 감사
<간증문>
칠 남매 중 셋째 딸인 나는 좋은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일찍이 해외유학을 하신 아버지께서는 교육적이면서도 자상하신 분이셨고, 대갓집 맏딸이셨던 어머니께선 부지런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시는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과 학교시절, 착하고 순종적이며 예의 바른 아이로 주변어른들과 친구들의 인정과 존중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어려서부터 이른 새벽에 언니들을 따라 열심히 주일학교에 다녔고, 기독교 중‧고등학교 시절엔 성경시간에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구약인물들의 이야기를 줄줄이 발표하곤 했습니다.
1980년 2월 27일, 한경직목사님의 주례로 영락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니 손위 시누이 둘이서 우리 신혼 방을 다 정리해 두었다고 합니다. 내 월급명세서, 개인소지품까지 모두 포함해서입니다. 시부모님, 시동생, 두 동생 시누이와 함께 사는 결혼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큰 시누이는 수시로 친정에 드나들면서 남편과 함께 나에게도 아무런 존중이 없이 함부로 대했습니다. 시어머니께선 결혼한 첫 달부터 우리 부부 두 사람의 월급봉투를 통째로 내놓으라십니다. 시동생, 셋째 시누이 결혼자금을 위해 계를 붓고 있는데 그 비용을 모두 우리가 감당해야한답니다. 남편 월급은 몽땅 드릴 수 있지만 두 사람 것 모두는 아닌 것 같다고 했더니 “그러면 곗돈은 어떻게 하느냐?”며 그때부터 엄청난 시집살이가 시작됐습니다. 교회출석은 하시지만 감사와 기쁨, 사랑보다는 불만과 투정, 원망, 요구, 상처가 많으신 시어머님과 손위시누이들로부터 겪는 유별난 시집살이는 직장과 가정, 삼남매 육아로 힘겨운 삶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전문직 회사원과 세 아이의 어머니, 아내,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았던 역할 중에서도 내게 무엇보다 감당하기 힘든 아픔과 고통을 주었던 것은, 중심이 없는 시어머니의 맏며느리 역할이었습니다. 시어머니께서는 어른의 품위를 잃은 채, 가사도우미와 함께 유치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며느리인 나를 수시로 욕하고 공격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남편의 이렇다 할 위로 한마디 없이 계속된 시집살이로 인해 외롭고 우울한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작은 아들을 낳은 직후, 내 딴엔 시집살이가 너무 힘에 겨웠는지 산후 우울증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었고 몸도 많이 아파서 출산 후 한 달여 만에 진행된 막내시누이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이 일을 빌미로 아직 몸과 마음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누워있는 임산부에 대한 큰 시누이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결혼식 직후, 온 시댁 친척들을 대동하고 집에 와서 아파트 거실 한 가운데 나를 무릎 꿇어 앉히고는 대역죄인 취조하듯 모두 한 마디씩 질책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한 사람씩 나를 공격할 때마다 시누이는 분노에 찬 추임새를 넣었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속수무책으로 하염없이 울고만 있었고, 남편은 격분한 누나에게 멱살을 잡힌 채 혼나고 있었습니다.
정말 외롭고 힘든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결혼생활 내내, 매일 밤을 울며 지새우다 출근하여 근무 중에도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어서 곤욕을 치렀습니다. 친정어머니께서는 딸의 힘든 상황을 짐작은 하면서도 속으로 가슴만 아파하실 뿐, 고통은 오롯이 나 혼자만의 몫이 되어 눈물로 밤길을 헤매다 통금시간 직전에 힘없이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무심한 남편은 내 손을 잡아주거나 등 한번 따뜻이 토닥여주지 못했습니다. 밤새내 혼자 울다가 아침이면 꾸역꾸역 밥을 먹고 출근을 했습니다. 회사에서는 전혀 아무런 내색 없이 열심히 일하는 내가 시댁에서 이런 고통 속에 사는 줄은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결혼한 지 13년째 되던 1993년 3월, 회사에서 관리직직원 대상으로 조기퇴직 프로그램을 발표하였습니다. 요즘은 좀 다르겠지만, 그 때만해도 여자들의 직장생활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이었고 더욱이 전문직여성이 직장과 가정생활을 병행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어서 직장생활을 정리할 세 번의 갈등의 시기가 있다고들 했습니다. 결혼할 때와 출산할 때, 자녀가 취학할 때가 그렇습니다. 갈등할만한 시기들도 다 지나고, 명문 대학을 갓 졸업한 엘리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회사, 더욱이 직원들 간에도 부러워하는 영업부의 전문차장(Advisory SE)이었던 나는 퇴직여부를 놓고 심각하게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가 계획하는 퇴직프로그램의 직접적인 대상은 아니었지만, 팽팽한 삶의 줄이 끊어져 버릴 것 같은 위기감으로 지쳐 있던 내게, 조기퇴직 프로그램은 의미 있는 선택의 기회로 다가왔습니다. 이젠 더 이상,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살아왔던 내가 아니라,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져도 괜찮은, 하찮은 존재로 버려진 것 같은 서글픔, 외로움, 처절함이 내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졸업과 함께 시작한 19년간의 회사생활을 하루아침에 마무리하는 일 또한, 쉽게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회사의 훌륭한 기업철학, 다양한 경험, 전문적인 훈련과 기회, 만나는 좋은 사람들, 나의 삶에서 소중한 성장을 주었던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 등...
퇴직여부의 결정을 하나님께 묻기로 하고 일주일간의 새벽기도를 계획하고 기도를 시작한 셋째 날, 나는 내 삶에서 정말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막 기도를 시작하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뜨거운 눈물과 함께 “주님, 제가 가해자입니다.”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고백이 내 입에서 터져 나온 것입니다. 결혼 후 지금껏, 나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피해자였는데...
날마다 엉뚱한 말로 나에게 누명을 씌우고 자식들을 자극하여 동정을 받으시던 시어머니, 해외의 친척들까지 동원하여 나를 몰아세우며 공개 재판하던 큰 시누이, 내 울타리가 되는 것이 부모형제를 배신하는 것쯤으로 여겼는지 둘만 있을 때조차 위로의 몸짓 하나에도 인색했던 남편... 어릴 적부터 싸움 한번 안 하고 자랐던 나는 말 못하는 억울함으로 밤마다 꿈속에서 가위눌리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왔는데 가해자라니...
그러나 늘 무심해서 원망스럽기만 했던 남편의 마음속에 감추어진, 어머니와 누나들에 대한 두려움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고, 안팎이 다른 행동으로 힘든 시집살이를 시켰던 시어머니와 시누이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나의 아픔만을 껴안고 괴로워했던 나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라는 자책감이 들었던 것입니다. 억울하게 겪는다고 여겨졌던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서, 거칠고 정서가 메마른 시어머님이 한 없이 측은하고 안타깝게 여겨졌습니다. 잘 알 수는 없으나 거칠게 행동하는 큰시누이의 마음 속 깊은 상처를 헤아려보게도 되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온 가족애(?)의 틈바구니에 아직은 세상물정에 철부지인 내가 함께 끼일 수 없는 이방인이었음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보호받지 못하는 나의 외로움이나 섭섭함보다는, 어머니와 큰누나에 대한 두려움으로 아내를 지킬 어떤 시도조차도 할 수 없는 남편의 어정쩡한 무력함이 더욱 내 가슴을 저리게 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그때도 나를 사랑으로 지켜보고 계셨음을 나는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와 함께 뜨거운 눈물을 흘리시며 나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사흘간의 새벽기도 후에 주저 없이 회사에 사표를 내고 퇴직한 후, 며느리와 아내, 어머니의 역할에 전념하였으며,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감사와 기쁨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지난 날, 직장업무로 바쁘게 활동하던 나를 이해하고 조용히 지지해주었던 남편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시어머니에 대해 측은지심으로 시작했던 마음이 어느 샌지 진심어린 사랑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아이들도 할머니를 사랑으로 극진히 섬겼습니다. 온 가족의 관심과 사랑, 그리고 축복 속에서 메마른 마음이 점차 회복되어 가셨던 어머님은 91세를 넘기고 평소에 기도하시던 대로 평온하게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시어머니의 복된 임종은 어머님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큰 선물이요, 축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님의 평안한 말년의 삶은, 또한 나를 회복시키고 성장시켜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아갈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거의 30년을 함께 하셨던 시어머니와의 삶을 통해,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랜 아픔의 시간들을 뚫고 나오면서 깨닫게 된 것은, 외롭게 억울함을 당할 때에도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 나와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의 때에, 내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가장 좋은 방법으로 멋지게 교통정리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나에게 고통을 주거나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은 결코 나보다 강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힘들고 아픈 사람이라는 깨달음입니다. 부조리와 억지를 겪으면서도 적절하게 대항하거나 싸울 줄 모르는 나의 무력함을 답답해하고 억울해하거나,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는 힘들고 막연한 기도보다는, 애틋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아픔을 돌아보고 잘못을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회복을 위해 축복하는 기도가 더 유효하며 강력하게 응답받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오는 감사와 평안이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합니다.
(현)전문심리상담사 (전)한국아이비엠(주) 전문차장
고윤숙 회고록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2026년 1월 20일 출간
<에필로그>
고윤숙 권사님의 회고록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는, 굴곡진 세월을 지나온 뒤에야 맺히는, 영혼의 열매와도 같은 책입니다.
성경 아가서 6장 10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침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권사님이 걸어오신 삶의 뒷모습이 떠오릅니다.
1974년, 기술의 불모지와도 같았던 시절에 IBM 엔지니어로 첫발을 내디디셨던 그 시간. 그곳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차가운 기계의 언어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따뜻한 믿음의 언어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치열한 일터 속에서도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며, 일과 신앙,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삶을 하나님 안에서 아름답게 엮어오셨습니다.
그러나 권사님의 삶이 가장 찬란하게 피어난 순간은, 오히려 인생의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는 나이, 예순 즈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안식을 말할 때, 권사님은 다시 배움의 길로 들어서셨습니다. 상담학 박사가 되셨고, 또 한편으로는 붓을 들어 국전 작가로서 예술의 세계를 펼치셨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삶이 점점 작아진다고 말하지만, 권사님의 삶은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넓어지고 더 깊어졌습니다.
시온찬양대 후배로서 가까이에서 뵈어온 권사님의 삶은, 마치 다윗의 시편을 직접 듣는 것처럼, 깊고 맑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고난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그것을 회복의 디딤돌로 삼으셨고, 기쁨의 산 위에 설 때에는, 그 모든 영광을 오직 “은혜”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돌리셨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처럼,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는 고백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권사님의 삶 전체가 들려주는 하나의 간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넘어, 우리 모두에게 다시 일어설 소망의 노래가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약속합니다.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그 빛이 청청하리라.”
권사님의 남은 여정 또한, 늘 아침빛처럼 밝고, 해처럼 맑고, 믿음의 깃발을 든 군대처럼 당당하게 빛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한 시대를 믿음으로 걸어오시며 우리 곁에서 보석처럼 빛나 주신 권사님께, 깊은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전합니다. (JIS)

"주님, 제가 가해자입니다." (회개와 용서를 통한 회복과 감사)
Sook
2026.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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