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의 길을 갈 때마다 장성댐을 지나친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어릴 적의 철없던 시절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그 때 양정모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고 온 나라가 흥분하여 여름 막바지에 열기를 더하던 때였다.
장성은 돌아가신 할머님의 친정이었다. 지금은 안 계시지만 작은할아버지 그러니까 할머님의 동생분이 계셨고 할머니께서 아시던 고향 분이 아직 살아 계셨던 때였다. 지금도 장성이 큰 도시는 아니었지만 그 때는 더 했다. 장성에서 기차로 내려서 한참을 걸어 들어간 기억이 있으니까.. 장성이라는 곳은 낯선 곳이었다.
할머니와 나는 장성에 가기로 했다. 할머니의 고향이며 그곳에는 작은할아버지 내외가 계시고 할머니의 외사촌이 있으며 중요한 것은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다. 난 한 번도 할아버지의 산소에 가보지 못했다. 여행을 한다는 기분에 약간은 흥분하여 따라 나섰다.
장성 역에 도착하여 버스를 타고 내 기억으로는 한참을 가다가 내려 또 한참을 걸어들어 갔다. 겨우 도착했다. 반기는 작은할아버지(실은 선친의 삼촌) 내외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하였다. 집에 들어가는 순간 약간의 실망이 있었다. 전설의 고향에서나 아니면 민속촌에나 나올 듯한 그런 집이었다. 화장실도 멀리 떨어져 낮에도 약간의 공포를 느끼게 한다. 일을 볼 때면 떨어질까 밤에는 무언가 밑에서 나올 것 같은 무서움을 느끼는 그런 변소였다.
무엇보다 텔레비전이 없다는 것이 싫었다. 친구도 없는데 텔레비전이라도 봐야 하는데....
첫날 오후에 그 곳에 저수지에 물놀이를 하러 갔다. 동네 아이들을 따라 저수지에서 놀았다. 비가 적어서 물이 적었고 무엇보다도 황토 빛나는 물이었다. 쌍방울 흰 팬티를 수영복 삼아 놀았는데, 잠시 후에 붉그스럼한 수영복(?)이 되어있었다. 그 동네 아이들은 내용물이 다 비추이는 가죽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물놀이가 지루해지자 집에 돌아온 나는 할머니를 조르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보러가자고... 할머님의 사촌 댁에 가기고 했다. 그 집은 약간은 부자였다. 기와집이었고 방도 많았다. 그곳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텔레비전을 볼 것을 기다렸는데, 그 분은 꽤 구두쇠였다. 텔레비전 켜면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나, 라디오만 듣다가 결국 그냥 돌아왔다.
어린 나에겐 참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친구도 없고 텔레비전도 못보고 사방이 컴컴한 시골에 화장실도 무섭고, 시골의 모기는 몹시도 사나왔다.... 이 모든 상황들은 나로 하여금 할머니를 조르도록 했다. 집에 가자고.. 하루 밤을 지나고 나면서 나의 외침은 점점 커졌다.
다음날 아침 나는 짐을 싸들고 집에 가자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역정을 내시는 할머니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고 말씀하시는 할머니, 집요하게 졸라대던 나는 억지를 부리며 가방을 메고 혼자 나갔다. 시골길을 혼자 나와 버스가 다니는 길까지 나왔지만, 버스를 탈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작은할아버지에게 이끌리어 집에 돌아갔고 할머니에게 몹시 맞았다. 분함에 엉엉 울었다.
그 때 비가 오기 시작했다. 장대같은 비가 사방에 떨어져 부서지는 물방울의 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그곳은 비가 오지 않아서 근심이 태산같았는데, 그 비가 와서 마을 사람들은 반갑다는 것이다. 할머니께서 비를 가져다준 손님이라고 이웃 사람들이 찾아와 고맙다고 인사까지 했다. 비가 와 저수지에 놀 수도 없었다. 지루함에 못 견디는 것을 보셨는지 할머니 사촌 동생 되시는 분과 약간의 타협 있었던 듯 선뜻 작은할아버지께서 텔레비전 보러 가자고 하셨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안가서 지루해졌다. 한낮이라서 TV 프로그램이 나올 리가 없었다. 올림픽 기간이어서 그나마 스포츠 경기들이 방영되기는 했지만 어린 아이가 얼마나 만족할까? 금방 뾰루퉁해져서 다시 작은할아버지 댁으로 돌아와 할머니를 조르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자고.....
결국 할머니는 일정을 이틀이나 앞당긴 채 철없는 손자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눈물을 흘리시며 인사를 나누시던 할머니와 작은할아버지의 모습을 그땐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께선 그 이듬해 늦가을에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당신의 죽음을 준비나 하는 듯이 마지막으로 고향 땅을 밟으시려 했었나보다. 할머님의 동생을 무던히도 보고 싶어하셨지만 자식 키우시느라 손자 거두시느라 몇 해를 보지 못하시다가 겨우 죽음을 앞두고 한 번 보려는 마음에 가셨는데, 어린 손자는 그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나보다.
어느덧 세월이 30 여 년의 세월을 훌쩍 보내고 나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철없는 어른이지만 그때를 돌이켜 생각하면 슬퍼진다.
할머니는 동생이신 작은할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고향 땅을 얼마나 밟고 싶으셨을까? 죽음을 얼마 안 놔두고 마지막 밟는 고향 땅이라 얼마나 그 마음이 간절했을까? 가슴 아팠을 할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지는 듯하다.
내가 조금이라도 할머니의 입장을 생각했더라면, 할머니와 작은할아버지의 관계를 이해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랫동안 서로를 보지 못했던 그 두 분의 마음을 이해했더라면.... 그토록 가고 싶던 고향에 갔건만, 그 마음을 이해했더라면...
지금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보면서 살기보다는 내 입장에서 이해의 폭을 좁히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할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작은할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처럼 그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여야 깨달을 수 있을까. 어른이 되면 어른이 되면 이해할 날이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어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나 보다.
이런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의 관계는 더 좋아질텐데. 나와 너의 사이가 좋아지고 우리의 가정이 좋아지고 우리의 사회가 좋아지고 우리의 나라가 좋아진다는 것이 그리 먼 것만은 아닌 듯 싶은데 말이다.
이 땅의 기독교가 세상과 다르다는 것 - 그것은 진리이지만, 이 진리가 세상을 무시하고 공격적 선교를 해야한다는 것은 아닐텐데...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가 편협하다는 것인데, 성숙한 신앙으로 이겨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더럽고 교회는 거룩하다는 흑백논리를 가지지 않으셨다. 오히려 낮고 천한 자들, 소외 당하는 자들의 편에서 그들을 섬기셨다. 예수님의 이런 마음을 이해한다면, 세상은 더럽고 추한 곳이 아니라 섬김의 장소이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장소가 될텐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먹는다면, 생각이 다르다고 서로의 입장이 다르다 할지라도 배려하면서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지 않을까? 종교가 다르다 할지라도 원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친구로 만들 수 있을 때, 깊은 배려가 그들의 마음을 살 수 있을 때, 하나님 나라의 선교는 훨씬 가까이 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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