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기 위하여
어떤 일이나 사건을 전개해 나가실 때에 일어나는 괴로움이나 어려움은
그것은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주의 거룩한 역사가 시작이 되는 그곳에서
나의 삶이 한 모퉁이를 장식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고난이요 아픔이라고 해도
하늘의 차원에서 보면 최고의 아름다움이요, 영광이요,
그의 삶에 가장 부유한 시간대이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사들의 칼날에 십자가의 처형으로,
맹수들의 발톱과 이빨에 갈가리 찢겨져 죽고,
목을 베이고, 사지가 톱에 잘려 죽는 극한 순교가 이어져도
주의 거룩한 역사를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기에
그들은 그 아픔을 영광과 자유와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축복으로 보았다.
AD 50년경부터 로마정권으로부터 대대적으로 박해가 시작된 후
약 270년간 초대 교회 성도들은 카타콤(지하묘소)에서
어떤 이는 평생을 햇빛 한 번 못보고 살다가 죽었고
주의 사랑 때문에 가족과도 사랑의 따뜻함 하나 제대로 갖지를 못하고
자신의 삶의 터전조차도 어느 한 날 평안이 깃들지 못했지만,
저들은 찬양이 터지고 감사가 터졌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이스라엘은
4000년 역사가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에 약 5~60년 정도만 평안을 누렸을 뿐
어느 한 날 평안이 없이 쫓겨 다니고, 흩어지고, 나라 없이, 유랑하며 살았었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그들을 보호하며 지켜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사람들이 왜 핍박과 고난과 아픔의 시간들을 가졌어야만 됐을까?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았으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그들을 붙들고 보호해 주어야 하는데
왜 하나님의 사람들은 조금만 잘못해도
오히려 책망 받고 징계 받으면서 쉬지 못하고 살아야만 될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한 깊은 영적인 답을 알지 못하기에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면서
본인도 모르게 불신의 관계에 빠져들기도 하는데
사실 이러한 문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단을 숭배하는 것이 된다.
사단은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물질의 부유함과 풍요함과 가정의 안정을 지켜주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면 물질도 초월해야 한다.
때로는 가정에서도 믿음을 지키려는 것 때문에
싸움과 분란이 그칠 날이 없고
직장에서도 믿음대로 살려는 원칙을 지키려는 자들은
윗사람들로부터 고운 눈총을 받는 자가 거의 없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하나님의 원칙대로 살려고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지켜 주셔야 하는데
원칙대로 살려는 것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소외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무리 잘못해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잘못하면 책망부터 해버리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안 믿으려고 하고,
믿는 자들도 믿음의 깊이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한다.
잘 믿으면 잘 믿을수록 현실적으로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더 많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단은 타협만하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준다.
사실 우리가 예수를 분명하게 믿지 않으면
자신의 귀한 것을 버릴 필요도 없고, 믿음 때문에 가정이 깨어지지도 않는다.
사실 내 삶에 예수가 없으면 세상에 눈치 보며 살 필요도 없고
모든 일에 소신껏 자신 있게 살면 된다.
하나님의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어디서나 편리하게 살수 있고, 무슨 짓을 해도 웃으며 살 수 있다.
분란의 원인인 믿음을 버렸으니 가족이 평안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외형적인 편한 조건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신앙의 깊이에 못 들어가며
자신도 모르게 사단의 영에 휩싸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꼭 힘들고 어렵게 하고 난 뒤에 끝을 좋게 하실까?
처음부터 좋게 해버리면 누가 예수를 안 믿겠는가?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아무리 긴 핍박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그 핍박과 고난이 끝나는 순간은
마치 눈 녹듯이 한 순간에 녹아버리고 풀어져 버린다.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 더 큰 춤판이
포도주가 떨어지고 난 뒤에 다시 이어졌던 것하며
나오미와 룻의 가정에 마침내 오벳을 낳고 기뻐하는 것처럼.......
애굽의 430년 고생도 열 재앙 앞에 한 순간 무너져 버리고
그렇게 기다리던 주의 신부들도
한순간에 신랑 예수를 만나는 것으로 고난은 끝이 나 버리고 만다.
그렇다.
아무리 긴 아픔이 이어져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끝은 반드시 영광으로 끝이 난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고난으로 이어져 온
기나긴 시간이라고 해도 끝은 갑절의 축복이다.
그러나 사단의 끝은 아무리 좋은 것 같아도 끝은 저주요, 빼앗김이다,
사단에게 미혹을 받게 되면 반드시 그 결과가
이를 갈며 슬피 우는 역사로 막을 내린다는 것을
영안이 밝은 자는 분명히 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현실의 안일함을 거부하고 언제나 주안에서의 자유를 선택한다.
영광의 끝을 아는 자들은 단 한번의 타협에
이 세상의 모든 권세, 영광을 받을 수 있다고 해도 예수처럼 단호히 거절한다.
사람들은 미쳤다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보고 있다.
택한 자에 대한 영광스런 결말을.......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