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원의 아름다운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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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DJ의 칼럼(1) - 남산 느리게 걷기
2016.09.06
조회 1129


(김도원 화백)




[일사일언] 남산 느리게 걷기

서울 충무국민학교에 다니던 내게 남산은 그야말로 앞마당이었다.
학교가 파하면 다시는 들지 않을 것처럼 가방을 집어 던지고는
직접 제작한 무기(?)를 챙겨들고 전쟁을 하러 가던 곳이다.
나무로 만든 총으로 실전을 방불케 하는 일전을 벌이다
잡히기라도 하면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느니
장렬하게 이 한 몸 나라를 위해 던지겠다는 듯
나름 분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남산에는 계절 따라 산딸기·머루·앵두·떫은 살구 같은
식량(?)이 널려 있어 그걸 따서 먹는 시간이
전쟁에 지친 우리에게는 휴식이었다.
잊지 못할 아카시아꽃잎.

미당 선생은 시 '자화상'에서 당신을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라 하셨다.
나를 키운 것은 오할쯤은 남산이었노라 회상해 본다.
대학까지 그 기슭을 맴돌았으니
사실 남산은 조금 진부한 이름이기도 하나
월드컵이 열리던 해부터 다시 남산엘 가고 있다.
세월을 돌고 돌아 다시 남산? 뛰어야 벼룩?
헛헛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하얏트 앞을 출발해 숲길로 20여분 올라가면
팔각정으로 이어지는 길과 만나게 되고,
국립극장 방향으로 내려오다 왼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남산순환도로로 이어진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코스 절반 정도는 달리던 곳인데
어느새 뛰기는 고사하고 여러 곳이 제법 오르막처럼 느껴지는
저질 체력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느리게 걷기'를 하게 되면서
이제는 '도로'가 아닌 '산'을 즐기게 되는 선물을 받았다.

클래식 프로그램을 진행해서 그런가?
숲길을 걸을 때마다 누군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는 상상을 하곤 한다.
저 숲 속에 피아노의 형체만 어렴풋이 보여도 좋다.
잠시 걸음 멈추고 감상에 젖어도 상관없고
그대로 가던 길 가면 또 어떠리.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을지로에는 감나무를 심어보자"
노랫말을 따라 부를 때 정말 그렇게 되는 상상을 했었다.
거리에 주렁주렁 달린 사과와 감, 생각만 해도 근사하지 않은가.
나는 요즘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브람스의 인터메조 작품 118-2가
어린 날 내가 전쟁놀이하던 그 숲에서 들려오는 상상을 하며
길을 걷는다.



※조선일보 201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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