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초대 공연을 안내합니다.
자세한 정보를 확인하시고 월~금 생방송 도중 #9390(50원 유료문자)으로 신청해주세요.
추첨을 통해 당첨자 분들께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마감]이화 창립자 메리 스크랜턴 서거 100주기 추모 음악회
비회원
2009.11.03
조회 575
* 이 공연은 신청하시는 모든 분들께 관람권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신청합니다 게시판에 말머리 [스크랜턴] 달아서 신청해주세요.
몇 장의 티켓이 필요하신 지도 적어주시면 수량만큼 드리겠습니다.
빨리 신청해주세요. 마감은 11월 11일입니다.
이화 창립자 메리 F. 스크랜턴 서거 100주기 추모 음악회
11월 16일 오후 7시30분 유관순기념관
* 프로그램:
모차르트의 Eine Kleine Nacht Music
슈베르트의 "송어" 쇼팽의 즉흥환상곡,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등 정통 클래식 곡들과 가곡, 실내악, 독창, 오페라 합창곡 등
다양한 음악들로 채워지는 음악회 입니다.
---------------------------------------------------------------------------
한국 근대 여성교육의 선구자 메리 F. 스크랜턴 여사 서거 100주년을 맞아 11월 16일 이화여고 유관순기념관에서 추모 음악회가 열린다. 스크랜턴 여사는 52세인 1884년 미국 감리회 해외여선교회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고 의사인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 가족과 함께 한국에 와 "남녀평등의 시대가 우리의 미래를 열어간다"는 원대한 꿈과 "배우고 깨우치는 것만이 잘사는 길"이라며 가난하고 천대받는 여성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준 인물. 1885년 조선에 온 스크랜턴 여사는 서울 정동 자신의 집에 학교를 열고 1886년 5월 "영어를 배워 황후의 통역관이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진 관료의 소실을 첫 학생으로 받는다. 이후 학생이 늘어나자 1887년 고종황제로부터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아 현재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로 이어진다.
스크랜턴 서거 100주기 추모 음악회를 기획한 이화여자고등학교 총동창회 장명수 회장은 "스크랜턴 여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갈 곳 없는 여성을 집에 데려와 씻기고 가르치는 한편, 진료소를 열어 가난한 이들을 치료해주고 음식을 나눠주었으며 전국의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음식이나 청소 등 생활 개혁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우리나라 여성교육의 선구자였다"며 "스크랜턴 여사의 아름다운 덕을 기리고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스크랜턴 여사가 그랬던 것처럼 약한 이 힘 되고 어둠의 빛 되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행사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음악회를 총연출한 서울대 음대 윤현주 교수는 "120여 년 전 초로의 여성으로 한국에 와 여성교육과 기독교 선교를 통해 한국 근대사에 기여한 스크랜턴 여사의 선구자적 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두남 작곡 '선구자'와 베르디의 아이다 중 '개선의 합창', 헨델의 메시아 중 '할렐루야'를 연합합창곡으로 선곡했다"고 말했다.
추모 음악회에는 피아니스트 이경숙 연세대 명예교수, 메조소프라노 윤현주 교수, 첼리스트 윤영숙 서울대 교수, 바이올리니스트 최한원 이화여대 교수, 피아니스트 한영혜 YH뮤직 대표, 소프라노 오덕선 서울신학대 교수, 바이올리니스트 김화림 마드리실내악단장 등 이화여고 출신 유명 연주자들과 합창단이 출연, 스크랜턴 여사를 기린다.
한편 스크랜턴 여사가 서거한 10월 8일을 전후 해 다양한 추모행사가 펼쳐졌다. 이화여대는 스크랜턴 여사의 업적과 정신을 되새기는 기념주간을 마련했다. 10월 7일 추모예배, 10월 8일 스크랜턴 여사 묘역 방문 및 학술 심포지엄이 전개됐다. 학술 심포지엄에서는 '스크랜턴을 찾아서' '스크랜턴의 여성교육 정신' '스크랜턴의 선교사역과 사상' 등의 주제 발표를 통해 스크랜턴 여사의 업적을 재조명했다. 특히 이번 행사에는 샐리 게일(47)씨를 비롯한 스크랜턴 여사의 후손 8명이 참석해 더욱 의미 있는 자리가 되었다. 스크랜턴 여사 후손들은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에서 개막한 추모 특별전(10월 7일~10월 31일)에 참석, 당시의 사진과 유물들을 살펴보면서 "이렇게 멋진 전시회를 통해 할머니의 업적을 다시 볼 수 있어 영광"이라고 감격해 했다.
메리 F. 스크랜턴 여사는…
메리 F. 스크랜턴 여사는 1832년 미국 매사추세츠 중의 감리교회 목사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 1855년 코네티컷 뉴헤븐의 윌리엄 T. 스크랜턴과 결혼, 외아들을 두었다. 40세에 남편과 사별한 스크랜턴 여사는 해외선교 기금을 헌금하고 지역 해외선교회 모임의 임원으로도 활약하는 등 해외 선교에 관심이 깊었다. 그의 아들 윌리엄 B. 스크랜턴은 예일대를 졸업하고 뉴욕의과대학에 진학, 의사로 활동했으나 장티푸스에 걸려 어머니의 간호로 이겨내자 여생을 선교사로 헌신할 것을 결심한다. 1884년 10월 스크랜턴 여사가 먼저 한국 선교사로 임명 받고,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은 12월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는다.
스크랜턴 여사와 아들 가족은 1885년 조선에 왔다. 그는 "배우고 깨우치는 것만이 잘 사는 길"이라며 가나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조했다.
"우리의 목표는 한국 소녀들로 하여금 우리 외국인들의 생활양식, 의복 및 환경에 맞추어 바꿔지기를 바라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다만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이 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우리는 한국적인 것에 긍지를 갖는 한국인이 되기를 희망한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통해 완전한 한국인이 될 것을 바란다."
(They, the girls, are not being made over again after our foreign way of living, dress, and surroundings, because it occasionally appears from home and even in the field that we thought to make a change in all ways. We take pleasure in making Koreans better Koreans only. We want Korea to be proud of Korean things, and more, that it is a perfect Korea Through Christ and his teachings.)
1891년 그는 이화학당장 자리를 로드와일러에게 물려주고 직접 여성을 전도하는 일에 주력했다. 또 청결한 음식과 청소 등 위생 개선에도 앞장서, 의사인 아들과 함께 병원을 차려 가난한 이들을 무료 진료해줬다.
스크랜턴 모자는 "서울 사대문 밖에 나가면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에게 음식과 의료혜택을 주고 싶다"며 남대문과 애오개, 동대문에 진료소인 시약소(施藥所)를 세우기도 했다. 이 시약소는 나중에 항일운동의 본산지인 상동교회, 아현감리교회, 동대문교회가 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쓴 보고서를 보면 이 할머니 선교사의 사랑과 열정은 더욱 뜨거워짐을 알 수 있다.
"만약 열 사람의 선교사가 있었다면 몇 가지 일에만 집중했을 것이고 훨씬 일을 잘 해냈을 것"이라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또 "내가 하는 일이 이 땅의 사람들 마음에 들든지 안 들든지 나는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면서 소외되고 힘없는 사람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섬겼다.
53세의 늦은 나이에 조선에 온 스크랜턴 여사가 24년간 조선 여성의 교육과 구원을 위해 헌신하다 1909년 10월 8일 소천했을 때 상여를 따르는 무리가 8km나 됐다고 전해진다. 스크랜턴 여사는 현재 양화진 외국인묘역에 영면해 있다.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가 작은 기와집에서 한 사람의 여학생으로 시작한 이화는 이제 123세가 되었고, 이화는 미션스쿨의 정신을 이어받아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앞으로도 수많은 '메리 스크랜턴'들을 배출해 지구촌 곳곳을 '자유? 사랑?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 것을 확신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다니엘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