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원의 아름다운 당신에게

음악FM 매일 09:00-11:00 (재) 매일 02:00-04:00

이번 주 초대 공연을 안내합니다.
자세한 정보를 확인하시고 월~금 생방송 도중 #9390(50원 유료문자)으로 신청해주세요.
추첨을 통해 당첨자 분들께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마감> 끌로드 치아리 첫 내한공연
비회원
2007.10.11
조회 1268

*공 연 명 : 기타리스트 끌로드 치아리 첫번째 내한공연 - *일 시 : 10월27일(토) pm 7:00 *장 소 : COEX 오디토리움 마스터 기타리스트, 끌로드 치아리 기타는 예부터 수많은 음악가들에 의해 사랑을 받아 온 악기이다. 그 중에서도 '기타는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말한 베토벤이나 '우수한 기타의 음색만큼 아름다운 것은 달리 없을 것이다'라고 칭찬한 쇼팽의 말은 한층 인상적이다. 기타는 고대 신화의 리라에서 발단해서 류트나 비우엘라를 모체로 17세기 무럽부터 음악계에 등장한 악기이다. 그리고 디오니시오 아구아드가 1825년에 저술한 교칙본에서 근대 기타 주법의 원리를 확립하여 페르난드 소르, 프란시스코 타레가, 세고비아 등으로 이어지는 기타 음악의 주류는 스페인을 무대로 꽃피어왔다. 현재의 클라식 기타를 우리가 스페니시 기타라고 부르고 있는 이유도 이처럼 기타가 스페인의 오랜 전통 아래서 자라온 스페인의 민속 악기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타의 역사는 우리 인간의 역사, 음악의 역사와 더불어 흘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타가 세계의 많은 음악 팬들로부러 사랑을 받아 온 것은 무엇보다도 그 음색이 멋있기 때문이다. 불과 여섯 줄의 현을 튕겨 만들어 내는 그 폭넓고 섬세하며 아름다운 음의 세계, 어쿠스틱 기타의 소리야말로 위대한 악성 베토벤의 말을 빌자면, 기타를 '모든 현악기 중에서도 가장 완성된 악기'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그 서정적인 통기타의 음색을 듣기가 예전처럼 쉽지 않다. 자극적인 음악이 상업음악 시장에 넘쳐흐르는 요즘, 귀청이 찢어지는 것 같은 일렉트릭 기타의 강렬한 소리에 익숙한 젊은이들이 과연 어쿠스틱 기타의 아름다운 음색을 접할 기회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의 기타리스트 끌로드 치아리는 순수한 기타의 음(音) 원천에 도달한, 몇 안되는 어쿠스틱 기타리스트의 거목으로 오래도록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마치 생명을 지닌 듯 미묘한 감정을 전하는 기타의 음색, 악상을 다지며 차분히 흐르는 그 가락‥‥‥ 끌로드 치아리가 연주하는 그 분위기 넘치는 음악을 빌어 그를 ‘무드 기타리스트’라고 명할 수 있다면, 오늘날 활약하는 기타리스트 중에서 아직도 끌로드 치아리의 뒤를 이을만한 무드 기타리스트가 나타나지 않고 있음은 그의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준다. 그만큼 끌로드 치아리만큼 오래도록 변함없이 인기를 누려온 기타리스트도 드물다. 우리나라의 무드 음악 팬들이 그의 감미로운 기타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1964년경 그리스 영화 '붉은 등(Red lanterns)'의 주제가 '라 플라야(La playa)'가 크게 히트하면서 부터였는데, 우리나라에선 '안개 낀 밤의 데이트'라는 제목을 붙여 부를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 후 4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이 곡의 아름다운 멜로디는 여전히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다. 지난 2007년 7월 음반 팝부문 판매순위에서, 내한공연을 앞둔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4집을 제치고 끌로드 치아리의 베스트 앨범이 1위에 올라 음반시장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던 적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오프라인 앨범판매시장의 통계를 조사한 결과 실제 구매자의 대부분은 치아리의 음악을 라디오, TV등에서 좀처럼 접할 기회가 없던 30대 중•후반이었으며 베스트 앨범의 일부를 듣고 자발적인 앨범 구매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즉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음악이 마음에 들어서’ 구매를 했다는 사실이다. 라디오를 벗하던 세대들의 가슴을 울리는 추억과 향수의 기타 선율, 끌로드 치아리 끌로드 치아리는 1944년 2월 11일, 남프랑스 코오트 다주르의 아름다운 관광도시 니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그는 지극히 평범한 소년으로, 그가 장차 기타 한 대로 전세계에 그 명성을 떨칠 인물이 되리라고 짐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어린 끌로드의 백부는 예외였다. 백부는 그 자신이 기타 연주자였기 때문에 총명한 어린 조카가 은근히 자기의 뒤를 이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다른 가족들은 알 리가 없었다. 끌로드가 11세 되던 해에 백부가 인도에서 사다 준 기타가 그가 소유한 최초의 악기였다. 어린 끌로드는 이때부터 하루종일 기타와 함께 살았다. 자기의 인생에 전환점을 가져다 준 끌로드의 기타를 다루는 솜씨는 백부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하루가 다르게 숙달되어 갔다. 당시 끌로드의 백부는 자기 악단을 이끌고 교외에 주둔한 미군 기지를 순회하며 연주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끌로드는 나이 불과 13세 때 백부의 악단에 기타 리스트로 정식 데뷔할 수 있었다. 아무리 백부의 악단이라지만 13세 어린 나이에 직업 기타리스트로 활약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끌로드 치아리의 연주가로서의 역량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학교공부를 거의 집어치우다시피 하며 오로지 기타 음악의 완성만을 위해 전심전력한 결과, 그의 묘미 있는 연주 솜씨와 깊은 음악성은 차차 악단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솔리스트로서 입신할 것을 결심한 것은 그의 나이 I9세때인 1963년이다. 이것은 그의 생애에 중요한 전환기가 되었다. 끌로드 치아리가 그의 음악적 재능의 모든 것을 주입한 최초의 녹음은 '허셔바이(Hushabye)'였다. 이 앨범을 발표하면서 그의 솔리스트로서의 길은 결정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이듬해인 1964년 끌로드 치아리는 불후의 명곡 '라 플라야(La plafa)'를 발표하였다. 그의 나이 20세 때였다. '라 플라야'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은 전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곡은 그리스의 바실리 조르지아데스 감독이 발표한 '붉은 등(Red lanterns)'의 주제곡으로, '라 플라야'는 '해변'이라는 의미이다. 원래 네델란드의 로스 마야스라는 기타 그룹의 멤버인 죠 반웨터가 1964년 작곡한 곡으로 영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는데, 일본의 영화수입사인 '닙폰 헤랄드'사에서 영화의 타이틀 백이 너무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하고 영화의 타이틀 백에 멋진 기타 연주곡을 한 곡 삽입했었는데 그 것이 ‘라 플라야’였다. 그런데 단지 무미건조함을 덜기 위해 삽입한 이 기타음악이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영화의 일본 공개 때 끌로드 치아리가 연주한 레코드가 사운드 트랙에 추가되어 주제곡이 되면서 대히트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곡은 '안개 낀 밤의 데이트'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곡은 프랑스에서는 피에르 바루의 가사를 실어 샹송이 되었고 마리 라포레가 불러서 히트하기도 했지만, 끌로드 치아리의 감미로운 애수가 넘치는 어쿠스틱 기타의 그 울림을 떠나서 '라 플라야'를 생각할 수는 없었으리라. 끌로드 치아리는 이 한 곡으로 150만 장의 디스크 판매를 기록하고 일약 세계의 젊은 기타리스트로 부각되었다 그의 대작업이 '라 플라야' 한 곡만으로 끝나 버렸다고 하면, 그는 필시 매스컴의 소모품으로서 그 캐리어에 종지부를 찍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첫사랑의 항구(Les calanaues de piana)', '사랑의 티화나(Ciari's Tijuana)' 등을 통해 세계 무드 음악 팬들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그가 틴에이저였던 시절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가벼운 다이너미즘과 정열에 찬 초기 작품들도 좋았지만 '첫 발자국(Le premier pas)' '나부코의 기타(Nabuco’s guitar)' '물 위의 암스테르담(Amsterdam sur eau)' 등 성실한 인간성과 원숙한 기교에 뒷받침 된 후기 작품에는 한층 더 그의 연주세계의 깊이가 마음속에 와닿는 것을 느낀다. 어쿠스틱 기타를 통하여 꿈, 낭만, 애수와 정열을 재현한 20세기 최고의 무드 기타리스트 끌로드 치아리는 이제 노익장이라는 말이 어울릴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 이 공연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초대합니다> 게시판을 통해 많은 참여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