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가장 많은 책을 읽은 때는 열한 살, 그 봄이었다.
누나는 광주로 형은 서울로 진학을 하고, 엄니는 우리 학비를 벌러 멀리 타지로 떠나고,
나는 학교가 끝나도 텅빈 집으로 가기가 싫었다.
내 발길은 학교의 작은 도서실로 향했다.
책을 펼쳐 들면, 그대로 다른 세계 다른 시간으로 이동해 버렸다.
미지의 땅을 탐험하며 길을 잃고 쓰러지고, 어느 시인의 심장으로 숨어들고,
주인공의 첫키스에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눈을 감고,
포성이 울리는 참호에 앉아 마지막 편지를 쓰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 길을 하얗게 떨며 말 달리고....
그렇게 작은 도서실에서 보낸 몇 달,
수백 권의 책을 다 읽고 더는 읽을 책이 없어서
가장 감명 깊었던 몇 권을 다시 꺼내 소처럼 되새김질했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소리와 유리창 밖의 붉은 노을과
오래된 책 냄새와 도서실 구석 책상에 앉아 계신 여선생님이 눈에 들어왔다.
"그 책이 좋은 갑다. 여러 번 읽는 걸 보니께."
"아... 여그 책들을 다 읽어부러서라."
그 뒤로 선생님은 주말이면 광주 집으로 가서 10여 권의 책을 보자기에 싸와
도서실 책장에 슬그머니 꽂아주곤 했다.
어느 날 자리에서 눈을 들어 보니 아무도 없는 도서실은 어둠에 잠겨 있고,
내 책상 앞에 작은 등불이 놓여 있었다.
선생님은 가만가만 발소리를 낮추고 걸어와 내 책상에 등불을 놓아주셨던 것이다.
상처 난 아이의 미칠 듯한 허기의 독서에, 작은 석상 같은 부동의 독서에,
가만가만 등불을 놓아두고 말없이 기다려준 선생님.
단 한 명의 책 읽는 아이를 조용히 지켜주던 선생님.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의 속 깊은 마음만은
아직도 꺼지지 않는 등불로 내 안을 비추고 있다.
은미한 빛으로 나를 감싸주신 선생님. 은미한 사랑. 은미한 당신.
*박노해의 <눈물꽃 소년> 중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