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17 (수) 서시
저녁스케치
201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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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 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소설가 한강의 <서시> 였습니다.


어느 날 운명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면
뭐라고 대답하고 싶으세요?

글쎄요. 저는...
한없이 벗어나고 싶었지만
받아들이는 편이 더 편하다는 걸 알았다고,
이 또한 내 삶이니 사랑할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