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1 (월) 땅끝이 땅의 시작이다
저녁스케치
2018.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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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땅 끝까지 가거라.

홀로, 두 발로, 꾹꾹 지문 찍듯이 걸어, 땅의 끝까지 가거라, 가보아라.
척추를 곧추 세우고, 그래, 갈 때는, 갈 데까지 가는 것이다, 가보는 것이다.
이마 위, 붉은 해 개의치 말아라, 검은 그림자 길어져도 뒤돌아보지 말아라.
길은 언제나 앞 아니면 뒤이거늘, 왼편이나 오른편은 염두하지 말아라.

마을 어귀, 등꽃, 라일락꽃 향기가 뒷덜미를 나꿔채더라도, 가거라.
자운영, 자운영 꽃들이 발목에 자욱하더라도, 저녁연기 뒷산 허리에 잠겨 있더라도
낮달이 짐짓 무심한 듯 떠 있더라도, 물안개 피어오르더라도, 멈추지 말거라.
시간은 언제나 너의 시간,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너를 놓치지 말거라.

그래, 그리하여, 걷고 있는 것이냐. 걸어서 가고 있는 것이냐.
길이, 저문 길이 네 몸속으로 들어갔다가 이내 등 뒤로 풀려나가느냐.
풍경과 네 몸 사이에 이제 아무것도 없느냐, 없어서 네가 길이 되었느냐.
너는 네가 되었느냐, 네 몸이 너를 알아보더냐.

지문이 닳아서, 발의 지문이 닳아서, 이제 발자국이 남지 않겠구나.
길이 너를 밀쳐내지 않겠구나, 몸의 속도가 무엇인지 알겠구나,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손에 잡히겠구나.
길이 출렁거리면 너도 출렁거리고, 길이 아득하면 너도 아득해지겠구나.
앞서 가던 기억이 어느새 함께 걷겠구나. 그래, 설움이나 외로움을 한두 마디 관념으로 압축했겠구나.
압축해서 길가에 버렸겠구나, 버려도 개운했겠구나, 버려서 가뿐했겠구나.
좋은 것보다 나쁘지 않은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이제 알겠느냐.

전에도 말했지만, 모든 길, 땅 위의 모든 길은 물에서 끝난다.
모든 길은 물가에서 자진하거니와, 너는 땅 위에서, 길 위에서 아직 무엇이 그리 무거운 것이냐.
길 위에서 걸으면서, 애닮은 것들, 안쓰러운 것들, 안타까운 것들, 어리석은 것들, 어쩌지 못한 것들의 이름을 다시 지어 보거라.
그것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시 명명할 수 있다면, 너는 드디어 너의 주인이다.

그래, 바다가 보이느냐.
땅의 끝이 가까워졌느냐, 길이 좁아지느냐, 땅이 다소곳해지더냐, 크게 숨을 들이마셨느냐.
땅끝에 홀로, 우뚝 섰느냐, 근육은 팽팽한 것이냐, 정신은 훤칠한 것이냐.
그리하여, 바다의 끝이 보이느냐, 경계가 선명하게 보이느냐.
그렇다면, 돌아보지 말거라. 거기가 땅끝이라면 끝내, 돌아서지 말아라, 끝끝내 바다와 맞서거라, 마주하거라.

바다, 눈 둘 데 없는 저녁 바다, 거기, 섬 같은, 불빛 같은, 인광 같은, 부표 같은, 잊을 수 없는 이름 같은, 물새 소리 같은, 흐린 냄새 같은 한 점이 보이느냐.
보인다면, 거기에 젖은 눈, 시린 눈, 시력과 시야를 꽂아 두거라, 꽂아두고 있거라.
거기 한 점 소실점에서 눈물이 솟느냐, 눈물은 마르느냐.

그래, 거기가 땅끝이라면
그리하여, 시린 눈, 젖은 눈이 다 말라서, 한 점 소실점이 화악, 온통 바다로, 어둠으로 변하더냐.
은하수가 우당탕탕 쏟아지더냐, 대륙붕의 아랫배가 불끈 일어서더냐, 바다의 끝과 처음 만나는 땅의 끝이 예리하게 떨리더냐, 거기에서 너의 끝이 바다의 맨 끝과 흔쾌히 손을 잡더냐.
왈칵, 눈물이 솟구치더냐, 쏟아지더냐. 온몸이 뜨겁고, 온몸이 환해지더냐.
너는 이윽고 돌아서는 것인데, 이윽고 땅의 끝에서 돌아서는 것인데

그래, 거기가 땅의 맨 처음, 땅의 시작이다.
땅끝은 바다의 끝이다, 땅끝은 물끝이다.

땅끝은 땅의 시작이다.
땅끝이 땅의 시작이다.

이문재 시인의 <땅끝이 땅의 시작이다>


지난해의 끝이
새로운 해의 시작이 됐습니다.
우리 앞에 새롭게 펼쳐진 시간들에
다시 한 발, 한 발 발자국을 찍어봐야겠죠.

가끔 누군가가
나의 뒷덜미를 잡아끌고
발목을 잡더라도
꿋꿋이 나의 할 일을 하며
그렇게 살아보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