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온 다음 날부터 하나둘
복숭아가 썩기 시작한다
작정한 것처럼
과즙을 뚝뚝 흘리며
두 개 세 개 무른 복숭아를 먹어 치운다
복숭아도 질세라 부랴부랴
썩는다
누가 먼저 먹어 치우고
누가 먼저 썩어 버리는지
내기라도 한 것 같다
자고 일어나니
또 몇 개 복숭아는 썩어 있다
썩은 곳을 도려내고
끈적한 손으로 성한 나머지를
먹는다
한 상자 복숭아를 고스란히
다 먹겠다는 것은 욕심
누구든 집에 복숭아를 들이면
반은 먹고 반은 버린다는
생각
고영민 시인의 <복숭아와 사귀다>
우리 손을 통하는 대부분의 일들이
복숭아 한 상자를 먹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잘 해본다고 하더라도
반은 해내고 반은 못해내 아쉬움으로 남게 되죠.
그렇지만 반이라도 해냈다면 아주 잘한 것 아니에요?
그 어려운 인생숙제에 절반은 건졌으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