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슬리퍼처럼
편하고 만만했던 얼굴이 떠오른다
슬리퍼는 슬픈 신발이다
막 신고 다니다 아무렇게나 이곳저곳에
벗어놓는 신발이다 언감생심 어디
먼 곳은 커녕 크고 빛나는 자리에는
갈 수 없는 신발이다
기껏해야 집 안팎이나 돌아댕기다
너덜너덜해지면 함부로 버려지는 신발이다
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안개꽃같이
누군가의 배경으로 살았던
오래된 우물 속처럼 눈 속 가득
수심이 고여 있던 얼굴이 떠오른다
이재무 시인의 <슬리퍼>
편하고 만만하지만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평생 일만 하셨던 아버지일 수도...
가족들 뒷바라지만 하시던 어머니일 수도...
도시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힘없는 약자일 수도 있죠.
멋진 배경이 주인공을 더욱 빛내주는 건데
주인공은 배경의 가치를 잊고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