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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조용필의 ‘정’, 그리고
홍경석
2015.03.13
조회 103
나는 1950년대에 출생한 베이비부머이다. 이 시대 필부들의 거개가 그러하듯 나 또한 지긋지긋한 가난과 가장 먼저 조우했다, 이어선 설상가상의 난제들도 잇달아 똬리를 틀고 앉았는데 가장 먼저의 ‘낭패’는 어머니와의 이별이었다.
그것도 고작 나의 생후 첫 돌도 안 된 즈음부터의 너무도 이른, 그러면서도 영원한. 좌절과 자학의 이중 늪에 함몰된 편부께서는 그때부터 철저히 당신 자신을 포기하는 삶에만 충실하셨다. 그 ‘충실’의 다만 일부만이라도 아들인 나에게 나누어 주셨더라면 ......
그래서 나도 소위 가방끈이 길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과연 박봉의 경비원이라는 중늙은이로 하염없이 늙어만 가고 있을까? 단언컨대 아니다! 아버지께서 최소한 고등학교, 아니 중학교까지 만이라도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배려’만 해 주셨더라도 특유의 열정과 끈기가 각별한 나로선 분명 어떡해서든 대학까지는 졸업하고도 남았으리라 단언한다.
국민(초등)학교마저 겨우 졸업한 나는 중학교를 갈 수 없었다. 그건 돈이 없어서였기도 했지만 더욱 현실적 고민은 내가 소년가장으로라도 나서야만 겨우 우리 부자(父子)의 밥벌이라도 할 수 있었을 정도로까지 당시의 경제상황이 최악의 벼랑 끝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내 마음과는 달리 그러나 도무지 갈 수 없었던 그 즈음의 중학교는 내게 있어 ‘신기루 중학교’에 다름 아니었다. 무심한 세월은 여류하여 나에게도 이순(耳順)이 저 앞에서 손짓한다.
이 삭풍의 세상을 6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딱히 벌어놓은 돈도 또한 뭣 하나 내세울 것 역시 없다. 하지만 주변의 친구와 지인들은 나를 무척이나 부러워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 어려운 ‘자식농사’에 성공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것도 크게.
아들과 그 아래 딸 남매를 둔 나는 사실 남들이 부러워하듯 자식농사엔 성공했다. 그러나 세상사 모든 것엔 공짜가 없는 법이다. 그 ‘농사’에 성공하고자 나는 아내와 합작하여 모진 노력을 경주했기에 비로소 가능했다.
친구와 동창, 그리고 지인들의 자녀 결혼식장에 자주 불려가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면 쉬 보는 현상인데 그건 00초등, 00중학교에 더하여 00고등학교 동문회 명의의 축하화환이 즐비하게 걸려있다는 것이다. 한데 그런 모습을 보자면 퍽이나 부럽기 그지없다!
왜? 나는 중학교조차 못 갔으니까. 어쨌거나 내 비록 아이들에게 남겨줄 재물은 없으되 34년째 여전히 올바른 가정의 정립과 아울러 불변한 아이들에 대한 나의 여전히 뜨거운 사랑만큼은 굳이 유산(遺産)으로 분류하여 나눠주고 싶다.
끝으로 아내와 연애를 하던 당시 우리가 자주 찾았던 음악다방에서 자주 들려주었던 조용필의 ‘정’을 기억하며 앞으로도 아내를 더욱 사랑하련다. “정이란 무엇일까~ 받는 걸까 주는 걸까~ 받을 땐 꿈속 같고 줄 때는 안타까워~ 정을 쏟고 정에 울며 살아온 살아온 내 가슴에~ 오늘도 남모르게 무지개 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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