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우리나라는 참 못 살았다. 따라서 나처럼 국민(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중학교에조차 진학할 수 없는 절대빈곤층은 우리 반에서만 얼추 3분의 1이나 되었다. 즉 60명이 정원이라고 하면 스무 명은 곧바로 돈을 벌러 사회로 나왔다는 얘기다.
헌데 그렇게 나온 나의 최초 ‘돈벌이의 직장’은 다른 데도 아니고 예부터 드세기로 소문난 사통팔달의 천안역 앞이었다. 따라서 그 즈음의 천안역 앞은 여러 방면에서 모여든, 탐탁하지 못한 사람들을 통틀어 낮잡아 이르는 말에 다름 아닌 어중이떠중이들의 집합소와도 같았다.
뿐만 아니라 소위 주먹깨나 쓴다는 이들도 속속 모여들었는데 따라서 당시의 천안역 앞은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아무튼 소년가장이 돼 구두닦이 소년으로 돈벌이를 하자니 툭하면 ‘구두닦이 형’들이 날 두들겨 패기 일쑤였다.
당시엔 왜 그랬을까 싶었지만 좀 더 세월이 흐르고 나니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나를 그처럼 구타했지 않았나 싶다. 어쨌거나 비록 초등학교조차 겨우 졸업했지만 그래도 학교에 다닐 적엔 반에서 1~2등의 성적으로 질주한 터였다.
따라서 우뚝한 자존심만큼은 한라산 아니라 백두산 이상으로 높았다. 그런 까닭에 이유도 없이 앞으로 안 맞으려면 자구책의 일환으로 운동을 하나 쯤 배울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여 시작한 운동이 주경야독 아니 ‘주경야복’으로 배운 복싱(boxing)이었다. 하지만 배곯으며 와신상담했던 그 ‘헝그리 복서’는 복싱으로 성공하는 꿈을 이루진 못 했다. 몇 달 뒤 기회가 되어 다른 안정된 직업의 열차로 갈아탄 때문이다.
그랬음에도 몇 달 배운 그 복싱으로 말미암아 이후론 그 누구로부터도 맞지 않았다! 되레 운동을 설 배우면 건달 된다더니 그 말이 틀리지 않아 한동안 ‘주먹잡이’로 명성을 날리기까지 했다.
과거 한국 복싱은 김기수와 홍수환, 유명우와 장정구, 문성길 등 이른바 헝그리 복서들의 투혼에 힘입어 한국 복싱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랬던 맥이 뚝 끊긴 건 우리 국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면서 더 이상 헝그리 스포츠는 세인들부터도 인기가 없어졌음의 방증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이렇게 ‘우울하던 차’ 마침내 낭보가 날아들었다. 한국 복싱이 아시안게임에서 12년 만에 금메달의 한을 풀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신종훈 선수가 라이트 플라이급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따내면서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는 뉴스에 참 반가웠다. 이를 계기로 한국 복싱의 전성기가 다시 도래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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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자존심만큼은
홍경석
2014.10.04
조회 65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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