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희의 꿈과 음악사이에

음악FM 매일 22:00-24:00

* 게시판 성격 및 운영과 무관한 내용, 비방성 욕설이 포함된 경우 및
  기명 사연을 도용한 경우 , 관리자 임의로 삭제 될 수 있습니다.
* 게시판 하단, 관리자만 확인할 수 있는 [개인정보 입력란]
   이름, 연락처, 주소 게재해주세요.
* 사연과 신청곡 게시판은 많은 청취자들이 이용하는 공간입니다.
  사적인 대화창 형식의 게시글을 지양합니다

김동률의 동행 부탁드립니다.
안기종
2020.02.16
조회 142
* 사연이 소개될 경우 익명으로 부탁드립니다.

한창 며칠 밤을 새워가며 아이들 생활기록부 작성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반 아이 하나가 쭈뼛거리면서 찾아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선생님. 저 그냥 생활기록부 포기할래요. 내신 성적도 낮아서
학생부 종합 전형에 지원해도 어차피 떨어질 텐데 열심히 써봤자 뭐해요….”

담임교사인 제가 평소 지켜봤을 땐 잠재력도 충분하고,
성실히 노력하는 아이라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이렇게 주눅 들어 포기하겠다고 하니 순간 답답함과 안쓰러움이 동시에 들더라고요.
그래서 다그치듯 말해줬어요.

“그렇게 쉽게 단념할거야? 너는 포기하든 말든 마음대로 해.
쌤은 너 포기안할 테니깐. 최선을 다해보고 안되면 후회라도 없지!
그리고 너는 왜 너 자신한테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
쌤이 보기엔 너처럼 그 직업에 어울리는 얘도 없는데.”

그런데요…. 분명 이 말은 제가 아이를 다그치기 위해 한 말인데,
도리어 제가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빨개졌지 뭐에요.
저 또한 최근에 시도해보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단념한 일이 있었거든요.

눈앞에 있는 산은 히말라야처럼 높아 보이는데,
제가 가진 거라곤 낡은 등산화 한 켤레가 전부인 것 같단 생각에
애초에 올라가볼 엄두도 안 냈던 거죠.
물론 주변에선 제가 아이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격려와 응원을 해줬어요.
“네 평소 모습을 생각해보면 한번쯤 도전해봤으면 좋겠다.”,
“중간에 실패하더라도 분명 배우는 게 있을 거다.”,
“처음부터 정상에 서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다들 시작은 비슷했다.”,
“산의 높이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끝까지 오를 의지가 있느냐가 중요하지.” 등등.

남의 일이니 쉽게 말한다고만 생각했어요.
산을 올라야하는 당사자는 자기들이 아니니깐 할 수 있는 쉬운 말.
그렇게 믿으며 저는 결국 산에 오르기를 단념했어요.
예전엔 높은 산에 올라보겠다고 항상 고개를 쳐들고 다녔는데,
막상 높은 산을 마주하자 도리어 고개를 숙인 거죠.
그런 제가 반 아이에겐 가당찮은 소리를 했던 거죠.
살아온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사는 것이 교사의 본분인데도 말이죠.

다시금 저희 반 아이가,
그리고 저 자신이 왜 그리 쉽게 단념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분명 나름대로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의지가 있는데.
답은 간단한 것 같아요.
저 아이나 저나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 어느 샌가 매몰되어 버린 거죠.
내신이 안 되면 그토록 원하던 꿈도 이룰 수 없다고,
조건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높은 산에 오를 자격도 없다고.
그러면서 어느새 스스로의 삶도 외면하게 된 거죠.

반성하는 마음으로 다시 아이에게 말했어요.

“있잖아. 꼭 입시 때문에 생활기록부를 쓰는 것만은 아냐.
네가 버티기 진짜 힘든 기숙학교에서 슬프고, 아프고, 좌절하면서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잖아?
쌤은 그 삶의 과정을 담아주고 싶은 거야.
네가 얼마나 괜찮은 아이인지를 대학에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니라,
5년 뒤, 10년 뒤의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거야.
네가 잊지 말라고. 스스로가 얼마나 제 삶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는지.
우리 진짜 힘들지만, 적어도 우리 살아온 삶만은 외면하거나 포기하지 말자.
쌤이 응원할게.”

제 속내를 읽었던 걸까요? 아이도 제게 말했어요.

“예, 쌤! 저도 쌤 응원할게요.”

댓글

()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깨끗한 댓글 환경에 동참해 주세요. 0 / 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