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7(토) 지도를 그리는 시간
비회원
201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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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가을, 학회에 초청을받아
급하게 터키 이스탄불행 비행기에 올랐다.
학회 장소는 이스탄불에서 140km 떨어진 '테키르다'라는 작은 도시.
이스탄불에서 출발한 시간은 오후 3시. 내 발표는 저녁 8시,
학회의 마지막 강연이었다.
오후 5시 테키르다에 거의 도착할 무렵,
그러고 보니 내가 학회 장소에 대해 아는 정보라고는
'테키르다'라는 사실밖에 없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어디서 학회가 열리고 있는걸까?
그 도시에 서너 호텔과 대학 캠퍼스를 뒤졌지만 학회가 열린다는
포스터나 플래카드는 어디에도 없었다.
등줄기에서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8시 시보가 라디오에서 울리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8시’라는 시간을 자동차 안에서 이렇게 맞이하고 있다니...
밤 11시가 되어서야 겨우 ‘포기’가 되었고,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 사이 눈여겨본 근사한 호텔에 투숙해 하룻밤을 보냈고,
아침은 20분쯤 떨어진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식사 뒤엔 간밤에 봐둔 예쁜 꽃길을 산책했다.
문득 나는 내가 이 도시에 대해 꽤 많은 걸
지난밤에 알게 됐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 도시의 지도가 머릿속에 새겨지고,
학회장소를 찾아헤매던 그 순간에도
내 뇌는 근사한 호텔과 멋진 산책로를 기억해둔 것이다.
여행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지도 위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인생에서 중요한 건 ‘지도를 그리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방황하고 길을 찾아헤매는 시간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 대해 애정을 갖고 지도를 그리는 시간을
선사해준다...
- 한겨레 21 문화 칼럼에 실린 정재승 교수의 에세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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