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동안 갚지 못한 빚
지민안
2024.04.12
조회 161
안녕하세요. 저는 70대 부모님의 아들, 40대 배우자의 남편, 초등학교 두 아이의 아빠인 40대 중반의 평범한 청취자입니다. 그동안 방송을 들으며 재미와 감동, 웃음과 눈물을 느끼던 차에 제작진 분들께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조심스럽게 글을 씁니다.

저는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린 30대 중반까지 너무나도 어렵게 살았습니다.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으나, 드라마에 나오는 막장 집안의 이야기를 모두 모아 놓으면 딱 저희 집 얘기라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렇게 가정을 꾸리고 가장 노릇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어머니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요즘 들어 “절에 들어가고 싶다.”, “빨리 죽어서 돌아가신 엄마 보고 싶다.” 등의 이야기를 자주 하십니다. 이제 인생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시는 것일까요? 얼마 전에는 죽기 전에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시더군요. 사연이 소개되어 사람을 찾은 사례를 들으셨나 봅니다. 어머니가 사연을 쓰실 줄도 모르고 해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들은 이야기를 제가 대신해서 글을 써 봅니다.

<어머니의 사연입니다.>
저는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먹고 살기 위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의 집 식모살이를 시작하였습니다. 부모님도 안 계시고 배움도 짧다 보니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21살이 되던 해인 1972년, 인천 부평동의 신도실업이라는 방직공장에 여공으로 취직하였고, 공장 안에 있는 기숙사에서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최갑순. 강원도 춘천이 고향이며, 저보다 한 살이 어린 20살로 기억합니다. 그 친구는 몇 살 아래의 여동생인 최향숙과 같이 공장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시절 그런 집안이 어디 한둘이었겠습니까? 두 자매가 춘천에서 먼 타향인 인천까지 와서 여공 생활을 했으니, 갑순이네 집안 사정도 녹록지 않았음을 묻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예닐곱명이 기숙사 한 방에서 지냈는데, 처지가 비슷하고 나이도 동년배라 그런지, 갑순이는 저에게 참 잘해줬습니다. 기숙사 방을 돌아가며 청소하는 규칙을 정했는데, 그 날은 제가 청소를 해야 하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웬 일로 방안이 말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갑순이는 우렁이 각시라도 된 양 “서양, 내가 청소 다 해놨어. 하루 종일 일 하느라 힘들었을텐데 쉬어.”라고 말하며 웃음을 지었습니다. 힘들기는 저나 나나 마찬가지인데 말이죠. 당시 저희는 호칭을 서양, 최양 이렇게 불렀었습니다. 그 후에도 갑순이는 제 청소 당번 날에 종종 청소를 해주었고, 저녁 시간에는 기숙사 앞에서 튀김같은 간식을 사와서 나누어먹곤 하였습니다.

몇 년 후 저는 직장을 그만두고 1979년에 충청북도 청주로 시집을 가게 되었고, 갑순이에게 편지로 결혼 소식을 알렸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인천에서 청주는 먼 거리였기 때문에 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는데, 갑순이는 먼 걸음을 마다않고 식장까지 찾아와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 후 갑순이에게서 결혼을 한다는 편지를 받았는데, 결혼 생활이 순탄치 못하고, 사는 게 녹록지 않아 찾아가보지 못했습니다. 공장 생활을 할 때 그렇게 잘해주었고,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와 준 갑순이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으니 얼마나 괘씸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시간이 흘러 연락이 끊겼고, 50년이 지난 지금도 갑순이의 소식은 알 길이 없습니다. 근래 들어 갑순이가 너무 보고 싶고, 50년 동안 갚지 못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보고자 자식들에게 부탁하여 탐정사무소에도 의뢰해 보고, 인터넷에도 글을 올려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인터넷을 통하여 알아보니 아직도 신도실업이 있다고 나와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천까지 직접 찾아가 보았습니다. 옛날의 공장 건물, 기숙사 건물도 그대로이고 해서 기대를 하고 사무실을 방문하였는데, 너무나 오래전 일이고 해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고 하더군요. 죽기 전에 갑순이를 볼 수나 있을는지, 너무나 늦어버린 건 아닌지. 결혼식에 꼭 가보았어야 하는데 후회막급입니다.

보고 싶은 최양, 잘 살고 있니? 너를 너무나 그리워하는 서양(서은자, 여, 73세)이 애타게 찾고 있다. 너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나를 얼마나 미워하고 있을지 알지만, 나도 50년 동안이나 마음의 빚을 안은 채 너를 평생 그리워하고 살았단다. 아직 늦지 않았다면 너를 만나 두 손을 꼭 잡고, 미안하고 고마웠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최 갑자, 순자를 쓰시는 70대 초반의 어머님, 장모님을 두신 자제분들, 사위나 며느님, 또는 그런 분을 알고 계시는 분은 꼭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신청곡: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
재미있어야 소개될 듯하여 사연과 반대되는 곡을 신청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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