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만나는 윤서씨의 가장 좋은 친구
은사시나무
2024.08.13
조회 94
새하얗게 삶은 행주를 탁탁 털어 널고 가스 벨브 모양을 확인합니다. ‘이’ 모양은 열린 것, ‘으’ 모양이 잠긴 모양입니다. 지난번엔 이 모양을 헷갈려서 열린 채로 퇴근하기도 했습니다. 완벽한 마무리로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서른 살 윤서씨는 찬방, 세상에 닿다에서 일하는 다운증후군 아가씨입니다.
“선생님, 어제 제 음악 나왔어요. 신청했어요. 비가 오니 그 노래 생각이 나요. 씨야의 ‘사랑의 인사’ ”. 흥분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릅니다. 윤서 씨는 음악을 좋아하는 아빠 덕분에 ‘박승화 가요 속으로’ 열렬한 팬이 되었습니다. 이십 대 중반에 일했던 카페를 어쩔 수 없이 그만두어야 했을 때, 집에서 빨래를 개고 청소기를 돌리며 늘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요즘 텔레비전 예능이나 음악은 속도가 너무 빨라 가사가 잘 들리지 않고 어떤 라디오는 나누는 대화들이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박승화 씨는 다릅니다. 음악도 좋고 멘트도 좋아 듣는 내내 신이 납니다.

어느 날, 윤서씨는 어플 사용법을 배우고, 휴대폰 뒷자리를 남기거나 이름을 올려 음악을 신청할 수 있단 것도 배웠습니다. 조용히 비 내리던 날, 퇴근하면서 7927 번호와 함께 사랑의 인사, 하늘이나 바람이 좋은 날엔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신청했습니다. 자신이 신청한 음악이 들려오면 온 세상이 내 마음을 아는 것 같아 다음 날까지 기분이 좋습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선생님, 꼭 신청하세요. 어플 하는 건 배워야 해요. 어렵지 않아요. 번호나 이름이에요. 좋아하는 노래 해봐요.” 라고 합니다. 윤서 씨의 맑은 얼굴을 보다 저도 도전해 봅니다. 누구보다 세상을 사는 일에 진실하게, 삶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작은 대화와 주어지는 일들에 감사하며 명랑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서른 살 윤서 씨 응원합니다.

박승화 님, 앞으로도 7927 윤서 씨 꼭 기억해주세요.

신청하는 음악은 이한철의 슈퍼스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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