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잊지 않았을까요?
김희선
2001.02.24
조회 24
우수도 지나고 봄을 알리는 비마저 내리고
꼬마도 없는 오늘 여유있게 차 한잔 마시며
창 밖을 보고 있습니다
창에 톡톡 튀기는 빗방울이 제 가슴을 적십니다
다 비워진 찻잔의 바닥에 남겨진 녹차가루처럼
아직까지 제 기억에 묻어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릴때부터 편지를 좋아한 저는 고2 여름방학때
청소년연맹의 펜팔코너에 제 이름을 올렸습니다
100 여통의 남학생 편지 이렇게 많이 오리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남동생과 저는 그 편지를 모두 읽으며 간추렸습니다
누구와 펜팔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몇 차례의 심사를 거쳐
네 통의 편지가 선택되었습니다
속초, 전주, 제주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울에 있는 학생의 편지
전 1년간은 이렇게 4명의 학생과 편지를 하다가 단 한명만이
오랜동안 아주 오랜동안 편지를 주고 받게 되었습니다
속초에 사는 학생이었답니다
그 친구는 글도 잘쓰고 글씨 또한 훌륭하였습니다
우린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어김없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편지에 익숙해지고 점점 편지가 오기까지의
기다림이 지루할 정도였습니다
친구가 군대를 갔을 때도 우리의 편지는 끊이지 않았고
복학을 하고도 편지는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린 그 긴 시간동안 단 한번도 만나지 않았고
서로의 목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길고 긴 편지속에는 서로의 사진도 함께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둘 중 먼저 얼굴이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옆에 있는 친구보다 더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겉봉에 발신자가 씌여지지 않은 낯선 편지를 받았습니다
우표의 직인은 속초로 되어있으니 친구가 보낸 편지는 아니었습니다
친구는 울산에서 복학하여 공부하고 있었으니까요
겉봉을 뜯어보니 일반 편지지가 아닌 자그마한 종이하나만
접혀져 있었습니다
접혀진 종이위에 파란색으로 씌여진 몇마디
--- 내 아들의 펜팔친구에게
내 아들은 5대 독자이며 건강한 남자아이다
아비로서 아들이 꾸준히 공부하기 바라는 마음에
이런 글을 쓰니 용서바란다
지금까지 서로 나눠온 편지와 우정은 이제
잊도록해라
그동안 네가 보낸 편지는 모두 태워버렸다
너도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기 바란다 ---

하얀 종이위에 씌여진 친구 아버지의 글을 마지막으로
전 친구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고 친구의 편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나눈 2600 여일 동안의 우정은 이렇게 쉽게 문을 닫았습니다
제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친구아버지의 손에 태워졌지만
전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를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몇 년을 간직하다가 93년 신랑을 만나고 결혼하면서
그 때서야 편지함속에 숨어있던 추억을 잊기로 하였습니다
친구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날이 벌써 10년을 훨씬 넘었습니다
이제 그 친구도 한 여인의 반려자이며 아버지라는 이름을
얻었겠지요
한가닥 피어오른 추억에 눈물 흘리는 저도 한 사람의 아내이고
7살 꼬마의 엄마가 되어 있으니까요
그 친구가 보낸 글들을 기억할 수 없지만 나지막히 이름을 불러봅니다
- 이 민 수 -
제가 기억하는 만큼 그 친구도 저를 잊지 않았을까요?
만약 언젠가 우리가 만났더라도 우린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었겠죠
서로의 얼굴을 모르니까요
이렇게 편지라는 건 오래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 향기는
사라지지 않나 봅니다
이게 편지의 매력이겠지요

이런 추억이 있는 것도 행복이지요!
요즘 김현정의한번 웃어봐를 자주 듣습니다
추억을 만들어준 그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에서
이 노래를 2월 26일에 신청합니다
그 친구가 듣고 있을 거라는 희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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