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집 아이들의 생일이 같다.
이재경
2001.02.22
조회 12
제가 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이 글을 씁니다.
우리의 만남 자체는 운명이다.
첫아이를 91년 11월11일 봉천동 소재 개인 병원에서 출산하게 되었다.
겁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한 내게 예기치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 막달이 되어도 아이가 거꾸로 있는게 아닌가... 게다가 거꾸리는 일찌감치 내려와 있고 자궁문도 조금 열려 있어 자칫 아이의 발이라도 빠질세라 버스타는 것도 주의하라는 의사선생님의 걱정을 들었기에 고민에 빠졌다.
왜냐?
아이가 제자리를 잡게하는 운동이 있는데 상체를 숙이고 엉덩이를 높게 드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데 심하게 움직이면 아이가 나올새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지경에 놓였다. 하지만 거꾸리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해서 예정일 보다 조금 앞서 부랴부랴 어머니께서 날을 받아 오셨다. 오전 12시이전으로...
1991년 11월11일 11시19분 엎치나 뒤치나 같은 숫자에 울음을 터트린 아이가 예쁜딸 수현이.
수술후 밤새 훗배앓이를 하고 다음날 치료실로 치료를 받으러 갔다.
내앞에는 이미 여러명이 줄을서 있었는데 심한 현기증으로 비틀대는 내게 자리를 양보해 주며 부축해준 고마운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미숙씨.
오후에 애 낳은 사람보다 오전에 애 낳은 사람이 몸을 더 못추수린다고 웃으시는 의사선생님이 은근히 밉기까지 했다.
양미숙.
그녀는 예정일이 10월 28일인데 아이가 내려오지 않고 아이도 작은 듯 싶으니 병원에서 조금 기다려 보자고 했다. 기다리다 11일 아침부터 촉진제를 한통 맞았으나 진통은 있어도 아이는 꼼짝않고 그자리. 다시 촉진제를 두병째 맞아도 진통만 계속될뿐 아이는 속타는 엄마의 심정은 아랑곳 않고 잠잠. 하는 수 없이 오후 5시쯤 제왕절개로 예쁜딸 민정이를 낳을 수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퇴원 전까지 병실을 오가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후 가끔 전화상으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거꾸리와 고집장이 아이들은 잔병 치레는 하였어도 잘 자라 주었고 우린 약속이나 한 듯 둘째 아이를 갖았다.
큰애를 제왕절개로 낳았기에 자연분만은 어려우니 수술 날짜를 잡으라 하기에 예정일이 94년 7월 26일로 잡았다.
미숙씨는 광명시로 이사를 갔기에 다른 병원에 다녔는데 예정일이 8월7일 인데 7월 22일로 하였다. 그런데 이런걸 우연이라 해야하나?
21일 7시가 넘어서 저녁을 먹고 막 수저를 내려 놓기가 무섭게 배가 살살 아파 오는것이 아닌가! 그날따라 그동안 잘 먹지 못헸던 한풀이라도 하듯 꾹꾹 눌러푼 밥 한공기에 솥에 눌러붙은 누룽지까지 빡빡 긁어 먹고난 후라 남편은 먹지 않아도 부른배를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아픈 모양이라 했지만 조금후엔 이슬까지 비치고 간격을 두고 통증이 시작 되었다. 당황하여 병원에 전화를 했더니 식사 후 8시간이 지나야 수술을 할 수 있다며 그 안에 심해지면 위 세척 후 수술을 해야 하기에 종합병원으로 가라고 하였다.
통증보다 더한 불안과 초조 속에서 더디게 아침이 열렸다. 남편과 아직 잠이 덜깬 딸아이의 손을 잡고 병원에 도착하였다. 애타는 내마음은 아랑곳 않고 두세시간이 지난 후에야 제왕절개로 잘생긴 아들 승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미숙씨의 둘째 이이 영호는 정해진 22일에 승현이는 갑작스런 진통으로 같은날에 세상 구경을 하였으니....
그리하여 큰아이 수현이와 민정이는 91년 11월 11일, 작은아이 승현이과 영호가 94년 7월 22일로 생일이 같다.
주위에서도 귀한 인연이라며 서로 다정하게들 지내라고 한다.
미숙씨와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런데 아이들 키우느라 2년 가까이 서로 연락을 못하고 지냈는데 얼마전 전화를 하였더니 이사를 했는지 어쩐지 전화 연락이 통 되질 않는다.
새삼 후회스럽고 안타깝다.
미숙씨가 이 사연을 듣게 되다면 꼭 연락 주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친다.

슬픈이야기-소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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