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가족 이야기
신양철
2001.02.18
조회 19
"양지가족이란 서울 상계동 불암산 기슭에 있는 사설 고아원입니다.
40 여년간 이어오는 사랑의 역정이 너무나 아름다운 곳입니다.
고아도,원장도 없는 고아원 - 오직 50여명의 "내새끼들"과 "어머니"만 있는 "양지가족"이랍니다.
여기 어머니 - 한종임씨,그는 독실한 기독교 장로이신 부친의 무남독녀로 해방 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일제때부터 걸인과 고아들을 돌보시며 "칠성피혁"이라는 제화공장(대구 칠성동에서 유래한 국내 굴지의 제화기업)을 경영하시던 유복한 분이셨습니다.서라벌 예대 부지를 기증하시는 등 사회적으로도 많은 선행을 하시었는데 1961년경 별세하시자 모친도 이어 돌아가시었습니다.
졸지에 고아가 된 이 한종임씨는 당시 12세의 소녀로 가정부의 도움을 받아가며 오갈데 없는 고아들을 계속 돌보게 되었습니다.한 동안은 있던 재산으로 물질적인 어려움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물정이라고는 전혀 모른채 결혼도 포기하고 아이들만 돌보는 이 처녀 엄마는 회사가 도산에 이르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1985년 회사는 고사하고 집마저 넘어가 무일푼으로 37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 중계동 산기슭에 비닐 하우스를 치게 되었답니다.
이제 당장 먹일 우유값이 걱정인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고, 밤이래야 눈좀 붙이다 보면 간난아이 보채는 소리에 일어나 지저귀 갈아 누이고 눕다 보면 또 옆에 놈이 깨고... 이렇게 잠 한숨 제대로 자 본 날이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이즈음 어느 귀부인이 오셔서 아이들 지저귀를 얼음을 깨고 손수 빨아주시는 봉사를 하시었는데, 이 엄마는 누적된 과로로 그만 졸도를 하였답니다.깨어나 보니 어느 대학병원이었는데 모든 의사들이 그 귀부인께 정중히 대하여 알고보니 그 대학 총장(전, 국무총리)댁 사모님이셨더랍니다.
여기서 6개월도 못되어 쫓겨나 지금의 상계동 동막골에 천막을 옮겨 친게 어언 15년이 된 것입니다.
그 동안 참으로 많은 분들이 봉사하고 또 돕고 하시지만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하는 것 - 이 고난과 사랑의 세월이 40여년을 이어와 이제 이 어머니는 50을 넘긴 처녀 할머니가 되었고,몸은 삭을대로 삭아 자기 몸도 추스리기에도 힘겨운 지경입니다
종종 양식이 떨어지면 "금식기도"를 하는데 이럴 때면 어린 것들까지도 밥 달라는 소리를 안 하는 것이 엄마의 가슴을 더욱 메어지게 한 답니다.
- 이 엄마가 교회들의 초청으로 간증을 하고 받는 약간의 사례비
- 무공해 콩나물을 길러 병원식당 등에 파는 수입
- 종교를 초월하여 돕는 손길들,학생,운전기사,기타 자기도 어려우면서 보태주시는 성금들
- 여기서 자라 가정을 이루어 나간 형제.자매들이 간혹 보내오는 얼마간의 돈들
이것이 양지가족 수입원의 전부입니다.
매일 아침 새벽 3시면 일어나 애들 도시락 50여개를 싸야하고 더우기 "준비물 값"하며 내미는 손들에 쥐어주어야 하는 잔돈만 해도 하루에 3~5만원은 족히 든다고 하니 이 50여 대가족의 의식주 생활비는 가히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대학에 떨어지는 놈이 없고,들어만 가면 아르바이트로 제 학비 벌어 걱정을 더니 얼마나 감사하냐는게 이 엄마의 기쁨입니다.
그 동안 무단 점거해 온 지금의 보금자리 - 오랜동안 땅주인과의 마찰과 고통도 많았으나 그 마저 팔리어 이제 비워주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도 인근에 경매건물이 있다고 행정관서에서 알려주어,팔린 집을 비워준다고 받은 얼마간의 돈으로 일단 계약을 했는데 보증금과 부채를 그대로 안다보니 지하실 한구석만이 이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양지가족 50여명이 들어가기에는 턱없이 좁아 지금은 너덧군데로 가족이 흩어져 있습니다.
강원도 홍천에 유원지 근처,여름 휴가철에만 사용하는 낡은 빈집에 19명이 임시로 가 있고,미취학 어린 것들은 아직 상계동가건물 한쪽 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이들의 오랜 보금자리에는 이미 매입자측 들어와 등산객들을 대상으로한 보리밥 집을 내었습니다.
또 오갈데 없는 노인 등 9분은 산너머 양주군 진건면에, 여기서 자라 출가한 딸네 집에 가 있는데 시집 어른들의 눈치가 보여 견디기 어려워하는 딸을 보며 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합니다.
나머지는 새건물 지하와 이곳을 거쳐간 자녀들의 가정에도 분산시켜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40여년의 긴 유랑 생활의 끝이 보인다고 이 어머니는 병상에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합니다.
매입한 건물의 3층 세입자가 나가겠다니 3천만원의 보증금만 마련해 주면 내 새끼들이 모여 양지가족들을 다시 이룰 수 있다는 그 소망인 것입니다.
누군가 해야할 이 일을 - 우리 대신 하는 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정성이 모이면 이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임을 확신 합니다.
새마을금고연합회 기독신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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