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언니
윤현진
2001.02.18
조회 22
어제 오랜만에 한통의 전화를 받고 제가 참 무심했다는 것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IMF가 한참 기승을 부리던 98년 8월,세상 모르고 캠퍼스 낭만 타령만 하던 지난 학기를 조롱이라도 하듯 공포의 성적표를 받고 결국 장학금은 물 건너가고 하던 아르바이트도 잘린 상태에서 부모님 표정을 보니 등록금 이야기는 차마 꺼낼수 없는 상태라 솔선수범하여 한학기 휴학을 하기로 했습니다.말씀은 안 하셨지만 집안 형편도 많이 힘든 상태였던지 부모님도 말리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어느때 보다도 책임감이 육중하게 어깨를 누르는 시기였지만 그래도 철 들고 처음 주워지는 자유시간이라 다음 학기 등록금과 용돈도 마련하면서도 보다 의미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물론 거기에는 저 같은 휴학생들로 편의점이나 피자집 아르바이트는 경쟁이 치열할데로 치열해져서 근무시간은 늘어나고 보수는 줄어든 탓도 있지만 그 외에도 앞서 말씀드린 그런 포부랄까 뭐 그런 것도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며칠을 벼룩시장 같은 거리 신문들을 뒤적거리던 중에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주야 2교대 하는 한 전자부품 조립 일을 하는 하청 중소기업을 알게 되었고 약간의 머뭇거림 후에 일단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경기 탓인지 저 같은 휴학자 들이 예상 밖에 꽤 많았습니다.
다음날부터 생산직 주간반에 바로 투입되었는데 거기서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마리나 언니를 알게 되었습니다.서울에 와서 기술교육 몇 달 받은후 여기서 일하게 된지는 얼마 안 된다고 했는데 일도 잘 하고 한국말이 서툴긴 해도 참 친절한 언니였습니다.우즈베키스탄에선 대학까지 나왔다고 하던데 그래선지 우즈베키스탄어,러시아어,한국어,영어 까지 4개국어를 구사햇습니다.물론 한국어는 아직 서툴어서 저의 짧은 영어단어 실력으로 간신히 의사소통을 하다가 다급해지면 역시 시대불변의 세계 공통어 바디랭기쥐를 사용하게 되었지만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언니는 점점 경상도 사투리로 한국어를 배우는 바람에 일하다가 꽤 많이 웃곤 했습니다.언니는 공장내 숙사에서 지냈는데 특근,잔업까지 도맡아 하는 바람에 숙사는 그야말로 잠만 자는 곳이었습니다.모처럼 휴일을 얻는 날이면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대형할인점까지 초컬릿 같은 간식거리를 사러 가든가 명절엔 서울에서 함께 직업훈련을 받았던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그해 겨울,저도 그런 곳에서 몸소 일해 보는 건 처음이라 유난히 춥게 여겨졌습니다.하루는 언니에게 우즈베키스탄은 여기 보다 더 추우니까 언니는 여기 날씨가 별로 춥지 않겠다고 했더니 언니는 고개를 저으며 여기 날씨가 더 춥다고 하더군요.하기야 숙사 보일러가 고장이라 전기요에 작은 전기난로 하나로 긴 겨울을 나야 했으니,거기에 멀리 가족들과 떨어져 있으니 그 외로움으로 얼마나 더 추워했을까?
식구들에 언니 이야기를 했더니 명절에 특별히 갈 곳이 없으면 우리집에서 밥 한끼 먹고 가라고 해서 극구 사양인 언니를 억지로 초대해서 그 해 설은 우리 집에서 함께 보냈습니다.명절이면 으레 그렇듯이 여자들이 할일이 무척 많아서 언니까지 처음 보는 제수음식 다듬는 일 도와야 했는데 무척 좋아하더라구요.초컬릿과 커피만 잘 먹는 줄 알았더니 떡이며 전이며 못 먹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약속했던 6개월이 지나 제가 그 공장을 그만 둘 때 섭섭해 하던 언니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언니는 어디서 구했는지 작은 액자 하나 선물로 주더군요.
무심한 저는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복학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까맣게 잊고 지냈습니다.
어제 오랜만에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처음에 한국에 1년을 예상하고 왔다가 1년 후에 고향에 집 살 몫돈을 만들고 나니 돈 욕심이 생겨 좀 더 있었다고 하더군요.이제 여기 생활 정리 하고 고향으로 들어갈 생각인데 목소리 한번 듣고 싶어 전화했다고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나니 그동안 제 자신이 참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이 방송될 즈음엔 언니는 그동안 비싼 비행기 값 때문에 전화와 편지로만 연락할 수 있었던 가족들 곁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겠지요.비록 언니가 이 방송을 들을순 없겠지만 이렇게나마 제 마음 나눠주며 미안한 느낌 조금은 줄여보고 싶습니다.
김현철 달의몰락

댓글

()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깨끗한 댓글 환경에 동참해 주세요. 0 / 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