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12시가 넘어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벨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들어온 남편은씻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요즘 일한다고 거의 매일 같이 새벽 서너 시에 들어와서 힘들다고 하더니
왠일로 조금 일찍 왔다 싶었는데 술을 마시고 들어 왔더군요.잠자리에 누워서 내 손을 만지던 남편은
" 자기야! 내일 레코드 가게에 가서 옛날 테이프 하나 사온나. 라라라 라라 ..."
하며 콧노래를 불러서
" 그거 패비 케이츠의 파라다이스 아이가?"
" 응? 자기도 알고있네."
" 그 노래를 내가 모르겠나. 자기 옛날에 억수로 좋아하던 노래잖아. 근데 갑자기 그 노래는 왜?"
" 오는 친구랑 술 한잔하는데 그 노래가 나오잖아. 그 노래 들으니까 야~~ 참! 옛날 생각나더라. 옛날에 내가 자기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나? 그때는 우짜든지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고, 뽀뽀한번 해볼라꼬 기회만 보고 있었는데..."
" 근데 지금은 왜 사랑이 식었는데?"
" 아니, 옛날에는 자기가 내 사람이 안 될까봐 애가 탔었고 지금은 항상 옆에 있으니까 안심이 돼서 그렇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내 마음은 변함이 없다.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가네..."
하면서 말꼬리를 흐리더니 이내 코를 골면서 자더군요.
선잠이 깨서 그런지 아니면 나 또한 옛날이 생각나서 그런지 잠이 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오랜만에 추억의 편지함을 열어 보았습니다.
약 10년 만에 열어보는 편지함은 먼지가 뽀얗게 쌓였습니다.모두 봉투는 버리고 받은 순서대로 펼쳐서 원고뭉치처럼 정리해서 연습장집게로꼽아 놓은 것 두 묶음이 " 왜 이제야 나를 찾으시유." 하는 것 같습니다.
.
그가 졸업하고 군입대하가전에 나는 마음을 정하고 그의 집에 방 한 칸을 다시 얻어서 제대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약속했습니다.군대 가기 전날 밤에 친구들과 정신없이 마셔버린 술 때문에 혼자 보낼 수 없어서
밤차를 타고 논산훈련소까지 따라갔습니다.
훈련소에 들어갈 때 까까머리 뒤통수를 한 대 때리며 군대생활 잘하라고 했을 때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얼마 지나서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부대에 배치를 받았습니다.
부산에서 가장 먼 곳으로, 최전방으로 그는 가벼렸습니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때가 시기적으로 조금은 불안한 때였지요.그가 군대 있을 때 한번 면회를 갔습니다. 거리가 끝에서 끝이다보니 금요일 낮에
출발하여 서울 언니 집에서 하룻밤 자고, 토요일 일찍 줄발했는데도 그곳에도착하니 오후1시, 많은 사람들이 면회를 신청하고 있었고 나도 면회를 신청하고
그를 기다렸습니다. 민통선안 골 골이 깊은 산골에 부대가 있어서 걸어 나오는데1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하나, 둘 만나 점점 수가 줄어들고5시가 넘으니 나와 다른 아가씨 한 명만 남았습니다.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만나지 못할까봐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습니다.강원도에 3월은 해가 빨리 지는 것 같았거든요.땅거미가 지고 어두워지려는데 그와 옆에서 기다리던 아가씨의 남자친구가
산모퉁이를 돌아서 모습이 보일 때 난 울고 말았습니다.
그 날은 많은 사람들이 면회를 와서 늦게 만난 우리는 방 구하기가 힘들었어요.
겨우 방 하나를 구했는데 네 명이 한 방에서 잘 수는 없어서 고민했는데마침 같은 부대에 근무하는 선임하사님이 그 마을에 살아서 우리 사정을 듣고빈방 하나를 내줬습니다. 그때가 3월이었는데 장작으로 군불을 얼마나 많이
땠는지 추운 곳에서만 자던 군발이가 너무 따뜻해서 뼈가 녹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곳입니다.그가 군대 생활할 때 가장 많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군사우편으로 일주일에 서너통이 올 때도 있었고 매일 일기 쓰듯 써서 보낼 때도 있었습니다.
민간인들이 들어 갈 수 없는 그 곳에 때묻지 않는 자연, 열목어가 산다는 두타연풀잎에 맺힌 영롱한 아침이슬,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보면서 저렇게 파란
하늘이 있었기에 우리 조상들이 고려청자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했었지요그리고 많은 시, 군대생활의 즐거움과 외로움, 나에 대한 그리움,
미래에 나와 함께 하는 삶 등등...
그가 제대를 하고 직장을 구하고 할 때 편지는 한 장도 없습니다.집게로 꼽아 둔 두 묶음의 글을 다 읽고 아래쪽을 보니 봉투 안에 든 편지
한 통이 보입니다. 이건 언제 받은 걸까하고 펼쳐보니 나에게 마지막으로 보낸마음 아픈 편지였습니다.
제대하고 일년정도 지나서 그의 나이 스물 여섯, 내 나이 스물 아홉에 시숙님을제쳐두고 그와 결혼을 했습니다. 제대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모아둔 돈도 없고, 시숙보다 먼저 결혼하는 바람에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단칸방에서 세를 사는 처지여서 참 많이 어렵고 힘들었습니다.문제의 그 편지는 결혼하고 처음 맞는 내 생일날 남편이 사무실에서 써서 우편으로 보낸 것인데
"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앞으로 행복하게 해주겠다. 생일 축하한다."는 내용이었어요.
편지만 달랑 보낸 그와 그 환경이 싫어서 저녁에 들어온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은커녕
" 내가 편지 한 통에 감격해서 광고에 나오는 여자처럼 용돈있으세요 하는 여잔 줄 알아. 이까짓 편지가 무슨 소용이야." 라고 해버렸습니다.
내가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가는 일입니다.
그 만큼 많이 힘들었다고 변명은 해보지만... 아니면 선물이 없어서...어쨌든 그렇게도 많은 편지를 쓰던 그이가 그 날 이후 다시는 내게 편지쓰지
않았습니다. 약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입니다.
그 동안 살기가 바빠서라고 생각해 보지만 그때 마음에 상처를 받았나봅니다.내가 좀 인내하고 나보다 더 힘든 그를 위로했으면 좋았을 그 시기에 그를
감싸주지 못한 것이 많이 후회가 됩니다.
한참동안이나 편지를 뒤적이고 생각을 하다보니 새벽 3시가 넘었더군요.곤히 자는 남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때 참 귀여웠는데 얼굴이 많이 삭았다
싶은 게 미안하고, 나이는 어리지만 생활력 강하고 변함 없이 나를 사랑한다니고맙기도 하고 고생하는 거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옛날생각이 잠을 이루지 못했답니다.
추신: 어제 저녁에 거의 날밤을 샜더니 커피를 마셔도 기분이 몽롱하네요.
혹시 ''파라다이스'' 들려줄 수 있으면 들려주세요.
그리고 남편이름이 ''갑섭''입니다. 그 때문에 학창 시절에 별명이 갑돌이가 되었습니다. 덩달아서 내 별명은 갑순이가 되어서
갑돌이와 갑순이의 사랑 이야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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