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0주년을 앞두고 있는 지금은
신혼때가 아득히 먼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진다.
1992년 3월 어느날
첫딸이 백일도 되기전
퇴근해 돌아온 신랑이랑 저녁을 먹고
싫다는 사람 억지로 끌어 고스톱을 했다.
그냥 하면 재미없다고 돈내기를 했는데
왜그리 안되던지
초저녁부터 시작된것이 자정이 넘도록 이만여원을 잃었다.
주머니돈이 쌈짓돈이라지만 연이어 지는데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얼굴이 벌개지고 호흡이 거칠어지고 표정관리가 안될정도로 화가났다.
늦었다고 그만 하자는 신랑에게 돈땄다고 그만하기냐고
우기며 계속하자고 했더니
결국 신랑이 딴돈 다 가지라며 물러나기에
체면도 불사하고 받았다.
유치하지만 기분이 좀 풀렸다.
그런데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후회막심한 일이 뒤이어 일어났다.
밤에 깰 아기 우유를 주기위해 젖병을 찾았더니
소독된것이 하나도 없는거다.
그래서 8개를 모두 삶으려고 소독기에 넣어
가스불에 올려놓고 기다리다가
잠자리에 든 신랑옆에 잠깐 누워있다가
나도모르게 그만 잠이든거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상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알지못하는 힘에 이끌이듯 거실로 나왔더니
"어머나 세상에!"
집안은 온통 회색의 연기로 매캐하고
가스렌지의 젖병소독기에서 불이 활활타고 있었다.
한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가스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쳤지만
당황을 해서인지 겁이나서인지 움직일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우연히 일어난 신랑에 의해
가스렌지는 곧 잠겼지만 불은 이미 렌지옆의 비닐벽지를 태우고
렌지후드의 상판까지 우그러트린 후였다.
신랑이 너 뭐하는거냐고 큰일날 애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나니 정신이 남과 동시에 이 매캐한 연기속에 있을
아기생각이 퍼뜩 들었다.
방에 가보니 아기는 콧구멍이 시커멓게 그을린채
색색 자고 있었다.
아기를 안고 맑은 공기를 쐬여주려고 베란다로 향했다.
잠시후 "딩 동~"
아파트 경비였다. 아파트 밖에까지 시커면 연기가 새어나오고
젖병이 타는 고약한 냄새에 다른 주민들이 불났다고 뛰쳐나오고
경비실에 신고하고 난리났단다.
참고로 우리집은 맨꼭대기 15층이었다.
"아휴! 챙피해" 나는 그래도 다행히 잠만 자는 아기를 안고
혹시나 아기가 깨어 울지는 않을까 조바심내며
경비가 갈동안 찍 소리도 못하고 베란다에 숨어 있었다.
그 후로 며칠동안은 밖에도 못나가고 밤중에 잠깐 잠깐
나갔다가도 누굴 만날까 무서워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달음질쳤다.
그런데 문제는 뒷처리..
렌지후드 그때돈으로 결코 적지 않은 8만원에 갈고, 비닐벽지 여러집 수소문해
같은무늬로 4만원 들여 새로 하고, 마음 좋은 우리신랑은
누구나 칠할수 있다는 한개의 만오천원 가까이 하는 "누구나"
페인트사서 일주일동안 팔자에 없는 페인트공이 되어 거실을
천장까지 페인트칠해야 했다.(페인트칠은 미련한 내생각이었다.)
그리고 우리신랑은 몸살에 걸려 며칠동안 고생했다. 당연한 결과다.
너무 미안하고 할말이 없었다. 신랑에게나,아기에게나,이웃에게나...
근데 더 억울한것은 나중에 벽지집에서 거실 도배를 하는데
드는 비용을 알아보니 십여만원 남짓이면 할수 있다는 거였다.
우리가 든 페인트 값만 해도 십만원 가까이 들었는데.
거기다가 신랑의 노동비에다가 몸살난거 약값까지보태면.......
이건 정말 미련한 짓이었다.
그땐 왜 그걸 몰랐을까?
그 후로 시어머니 오시면 별 생각없이 "뭐가 좀 달라진것 같다." 하시는 말씀에
혹시나 알게 되실까 도둑이 제발 저려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난다.
근데 한가지 소득이 있다면
마음좋은 우리 신랑의 인간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거다.
그일로 불평한마디 없어
안그래도 미안한 나를 더 미안하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참 철 없는 마누라였다
클론의 Blue In The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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