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우연히 책을 찾다가 아내의 일기장을 보았다.
아주 크고 오래된 일기장이었다.
난 아내가 일기를 쓰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정말 아내의 일기장일까 라는 생각으로 망설이다가 들쳐보게 되었다.
아내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94년 1월부터였다.
한자 한자를 모두 다 읽어간다는 것이 웬지 아내에게 미안한 맘이 들어 한번 휙하고 넘기면서 보는 정도로만 끝을 내려고 하였다.
아내가 매일 적은 것은 아니었고 힘들 때 슬플 때 기쁠 때 등 마음을 위로하고자 한번씩 써두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만 일기장을 덮으려는데 일기장 사이에 끼워져 있는 흰봉투가 눈에 띄는 것이 아닌가.
겉봉투에는 "사랑하는 그이에게" 라고 써져 있었는데 난 이런 편지를 받은 적이 없었기에 의아한 맘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지봉투는 열려 있는 상태였고 난 당연히 그 내용을 보아야 했다.
거기에는 두장의 편지가 있었는데 쓴 날짜는 작년 12월 이맘때.
한 장은 앞으로 태어날 아기에게 보내는 글이었다.
거기엔 아내가 아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기다리는지 등.... 아기에 대한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정성을 다해 적은 글이었다.
그리고 또 한 장의 편지.
그것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였고 최대한 담담하게 적으려고 애쓴 흔적들이 여기저기에 묻어있었다.
모두 옮기기엔 웬지 어려운 맘이 들어 간략하게 옮겨 적고자 한다.
당신에게!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던 아기가 이제 곧 태어나겠지요?
여러번의 아픔들이 우리를 더 준비된 부모가 되도록 한 것 같습니다.
제가 이글을 쓰는 것은 절대 일어나서도 상상조차도 해서는 안되고 하고 싶지도 않지만 사람의 목숨이 그리 마음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기에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 글을 남기려고 합니다.
저는 하루하루 출산을 준비하며 집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있어요.
당신의 속옷과 묻어두었던 옷들, 부엌의 그릇들, 나의 소중한 것들, 그리고 우리의 결혼반지와 통장, 가계부, 각종 영수증, 그리고 나의 일기 등등 .......
당신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시잖아요.
그래서 꼭 알아야 할 것들과 보관해두는 장소 등을 모두 적어두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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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 몇가지만 꼭 부탁드릴께요.
혹시 나의 아기만 이 세상에 남게 된다면-그럴리는 절대 없지만- 엄마가 얼마나 예뻤고 너를 많이많이 사랑했었는지만은 꼭 말해주세요.
얼마나 기다렸었고 널 지키기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해 준비해 왔었는지도...
그리고 저의 결혼반지와 아기를 가지고 써왔던 태교일기만큼은 꼭 나의 태어날 아기에게 물려주고 싶어요.
아들일까? 딸일까? 참 궁금하네요.
그리고,
저의 부모님.
자식이라고는 저밖에 없는데 제일 걱정되고 생각만해도 맘이 저리고 아프네요.
전 당신의 착한 맘을 믿어요. 꼭!!! 부탁드릴께요.
그 분들의 아들이 되어 주세요. 진심으로 부탁드릴께요.
약속해 줄 수 있죠? 전 당신을 믿어요.
그리고 딸노릇 끝까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그러니 그런 딸이 있었다는 것조차 완전히 잊고 행복하게 사셔야 한다고 꼭 전해주세요.
마지막으로 당신께!
당신에게 받은 사랑이 제게 얼마나 큰지 그리고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아시죠?
그러나 너무 오래 저를 기억하지는 마세요. 다만 당신의 마음 한구석에 잘 묻어주세요.
그리고 전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지낼거니까 당신도 꼭 행복해야 돼요. 알았죠? 그것을 보는 것이 정말 제가 바라는 일이랍니다. 종종 말해왔으니까 내 맘 아실거예요.
우리는 많이 늙어서 함께 세상을 떠나면 좋겠다고 항상 말해 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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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를 덮으며 어떻게 해야 하나 많이 망설였다.
내가 이 편지를 본것을 알면 싫어하지는 않을까?
피곤해서인지 아기 우유를 먹이다 함께 곤하게 자고 있는 아내의 잠든 모습을 보며 작년 이맘때 아내가 홀로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내겐 항상 너무 어리게만 보이던 아내였는데.....
막달이 되어 너무 힘들다며 투정을 부려도 바빠서 제대로 안마한번 해주지 못했는데.....
여러번의 아픔이 있었기에 내게는 언제나 감사하다며 행복해했었는데...
홀로 출산에 대한 두려움을 준비하고 이겨갔을 아내에게 정말 미안한 맘이 든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한번, "아기 낳기 전 옛날 어른들은 ''내가 다시 이 벗어놓은 신발을 신을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었대" 라며 아내가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기도 한다.
일을 하면서도 하루종일 아내의 편지가 생각나서 맘이 저리도록 아프다.
''내일은 아내에게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박상민-내 작은 행복
출산을 준비하는 아내의 유언장(?)
김영수
2001.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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