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동창생
이경아
2001.02.06
조회 26
안녕하세요. 얼마전에 만난 오랜 친구들과의 만남이 지치고 힘든 일상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 것 같아 한번 적어보았습니다.

듣기만 들어도 저절로 포근해지는 여고 동창생들을 얼마전 만났습니다. 거진 6개월만에 갖는 만남이라 어색하기도 하련만은 늘 여전하리라 생각하며 서둘러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무슨 무언의 약속인양 언제나처럼 매번 비슷한 모양새로 머물고 있을것이 분명한 그들을 만나는 시간은 애써 나를 포장할 필요가 없는 전혀 긴장감 없는 편안한 시간이었기에, 아이를 둘이나 데리고 그것도 모처럼 약속시간보다 좀더 앞서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딴에는 여유있게 약속장소에 나간다고 갔더니 아니나다를까 시간약속을 제일 잘지키는 경숙이가 그날도 제일먼저 아이를 데리고 먼저 떡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역시 참 그아이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오랜만이다 하는 인사로 모든 만남의 절차가 싱겁게 끝이 나버리지만 그래도 가슴은 어느덧 따뜻해져 왔습니다. 결혼 5년만에 천신만고 끝에 어렵게 얻은 쌍둥이들이 감기가 걸려 그중 덜한놈으로 한아이만 데려왔다며 쉴새없이 재잘재잘거리는 모습에는 아직까지 영락없는 단발머리의 수줍음이 남아있었습니다. 유난히 짧은 단발머리를 고집하던 아이, 수업시간이면 항상 교탁 제일앞에 앉아서 그 무서운 선생님들과 눈을 열심히도 맞춰가며 억척스럽게 공부하던 그 모범생이 이제는 자기의 모습을 코흘리개 아이들 앞에서서 보여주어야하는 선생님이 되어 있습니다. 제자리를 찾은 듯 말입니다.

우리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는 듯 열심히 자기 아이와 내 아이들에게 식당에서의 예절을 가르치고 있는 그 아이, 제버릇 뭐 못준다더니. 그러고보니 옛날 처음 만났을때도 도시락을 쉬는 시간에 먹는다고 화내던 그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났습니다. ''천직이다'' 라고 한마디 해주었더니 ''어머, 버릇이 됬나봐'' 하는 웃음마저 그때와 같은 것 같았습니다.

하나둘 친구들이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다 모이면 모두 6명인데 약속시간이 지난지 한시간이 다되어가도 고작 4명밖에 모이지 않는 한심한 시간관념을 가진 아이들입니다. 이십년이 가깝게 이어져오던 일이라 으레 적잖은 시간이 걸릴것이라 예상하였지만 갈수록 간격은 우리 나이처럼 더욱 더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만 여전히 아무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그저 편하거든요. 다년간 경험에 의하면요 이제 어디서도 안통하는 ''차가 막혀서''하는 변명을 해도 웃어넘길 것 같고, 설사 화를 내어도 하나도 안무섭거든요, 그날도 약국을 닫고 오느라 제일 늦게 오기로 한 친구까지 오려면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기다려야 하였지만 지루함이나 짜증은 모두의 안중에는 없었습니다. 기다림조차 즐거운 나이가 되어버렸는데도 미련한 우리들의 얼굴엔 웃음 가득이었습니다.

그날은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모임이 있는 식당이 한산하여 마음놓고 아이들 밥을 먹여가며 수다를 풀어놓으며 앉아있을 수 있어 더욱더 쭉쭉 늘어지고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예전엔 지금은 흔하디 흔한 휴대폰이 없어 약속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고정 지각생 친구때문에 장소를 몇번 옮기며 메모를 남겨놓고하며 정말 힘들게 모이곤 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번도 제시간에 맞춰오지 못하던 아이는 아직도 여전한것으로 보아 수더분한 우리들 친구들의 면면을 알만도하지요. 요란하지도 않으면서 고등학교 3년내내 붙어다니며 서로에게 억척스럽던 우리에게는 이런 변할줄 모르는 아둔함이 있었습니다. 그 무던함이 오늘까지 이어진것일까요 곗돈 한번 모이지 않아도 여전히 명색은 계모임이거든요, 물론 거창한 모임이름도 있고(그 이름 짓느라 많이 싸웠는데 그게 뭐였는지 지금은 아리송합니다.)회비도 걷지만 그날 다먹고 쓰고 하면 명목뿐인 통장엔 언제나 잔고없음으로 나온답니다.

철이 들면서 만나 지치고 힘든때를 말없이 지켜주었던 우리들이 이제는 한아이만 빼고 모두 아기 엄마가 되어 있습니다. 점차 아기엄마들이 되면서부터는 바람빠진 풍선마냥 자꾸 축 처지는 외모는 물론 이상하게끔 목소리까지 커지는 걸 보면 좋은말로 정감이 가는 아줌마가 되어가는 불길한 징조임에 틀림이 없나봅니다. 모임을 가지는 장소도 정말로 이제는 아줌마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계모임을 하는 한적한 외곽지 식당아니면 우리들의 수다를 풀어놓을 수도 없습니다, 여자 6명과 아이들 10명이 모이는 그 번잡함을 감당해낼 분위기 좋은 곳은 아무데도 없었거든요, 그날도 놀라는 식당 아주머니를 위해 맛있는 반찬도 더달라고 하지않았습니다. 우리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킬줄 아니까요.

집에서는 좀처럼 먹어보기가 힘는 돼지갈비가 숯불에 지글지글 타고 있어도 무뚝뚝하기만 한 남편이야기이며, 오늘 아침 반찬거리가 없어 김치국으로 했다는 둥, 바로 어제 만났던것처럼 아주 흔한 수다로 오랜만의 공백을 잊고 있었습니다. 애기들 울음소리, 뛰는소리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도 기막히게 다같이 웃을때를 맞출줄 아는 이 아이들을 만나면 낯설어하지 않아도 되고 편리한대로 잊을 수가 있었습니다. 잊혀지지 않았던 수많은 것들도 말입니다,

한손으로 입을 가려가며 오물조물 예쁘게 먹던 참한 아가씨들은 어디가고 우물우물 한입가득 음식을 먹고 있는 친구들을 오랜만에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이 친구들과 어느덧 17년을 같이 보냈습니다. 수줍음이 많아 남들앞에서 좀처럼 말도 없었던 그 아이들이 졸업식날 못내 아쉬워 텅빈 운동장에서 쭉 둘러서 손을 잡고 부르던 노래가 무엇이었는지는 이젠 알수 없지만, 그 추운 날의 따뜻했던 입김이 항상 우리곁에서 궤를 그리며 돌고 돌았던 것 같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이가 들며 하나둘 결혼을 하고서는 서로 연락도 뜸하여 정기적으로 만나지도 못하지만 불쑥 전화 한통화로도 언제든 만날 수 있고, 또 만나면 그저 머리모양이 바뀌었나 할정도로 거의 변함이 없는 모습들이 너무도 고맙습니다. 반갑지도 않은 세월을 먹어가며 학생에서 아줌마로 애기엄마로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왔지만 내가 바라보는 그들은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변해주지 않는 그 무엇이 있어 행복하다는 것이 가장 적당한 말일 것입니다. 앞서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있는 나를 견뎌낼 수 없을 때에도 허우적거리며 근근히 따라가고 있는 나를 보고도 그저 흐뭇하여 주었던 그들의 사랑 또한 그대로 따뜻하였던가 봅니다. 애써 낯선것에 익숙해지려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을 주는 그 향기를 늘상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이 만날 수 있을까만은 지금처럼 언제나 어디에서나 우리는 서로에게 17살 소녀의 모습을 보여주며 늘상 곁에 남아있을것이라 믿어봅니다. 여태껏 그래왔던것처럼 말입니다. 누구엄마가 아닌 여전히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겁없고 못된 기집애들을 만나는 날 그날만은 17살로 돌아가는 즐거운 날입니다.
변진섭:너와 마주칠 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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