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저는 망설입니다.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가 매우 걱정스러워 생각 속에서만 약속을 이행하려고 또다시 접어둔 자신이 매우 부끄럽습니다. 이러한 시간이 벌서 10년이 흘렀습니다. 할머니 그러나 오늘은 이 손자가 용기를 내어 33년 전 할머니와에 약속을 이제서나마 지키려고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강석 ,김혜영氏. 저는 33년 전 그러니까 제가 14살 때 일 것 같습니다.9살 때 초등학교를 입학하여 14살이 되던 해 6학년 그 해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 할머니와 저는 마당에 덕석(멍석)에 벼를 말리던 그 시절 이놈 의 달구새끼들이 휘저어서 땅바닥에 떨어진 벼 낱알을 주우면서 라디오에 동네 선배님들이 신청한 노래가 흘러나와 할머니와 저는 제 자신이 주인공인양 즐거워하며 라디오에 바짝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때 울 할머니께서 벼알을 주우시던 손을 잠시 멈추시고 "저 먼 아주 먼 나라 여행을 할 때 저렇게 라디오에서 전파로 흘러나오면 아무리 먼데 있어도 우리의 얘기를 들을 수 있겠냐?" 하고 쳐다보시는 할머니께 저는 대답했습니다. "할머니 내가 커서 할머니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춤을 추듯 아리랑 고개를 넘고 산을 넘어 손에 잡힐 듯 맑고 밝은 저 별나라까지 갈 수 있게 해주께 할머니 기다려". 이렇게 기다리라는 말을 해놓고 세월만 벌써 30년이 넘고 3년이 또 지나가고 있으니 할머니께서는 얼마나 지루하게 이 손자 녀석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강석 김혜영씨 두 분께서 저를 대신하여 울 할머니께서 들을 수 있게 큰소리로 읽어주십시오. 그러니까 울 할머니께서는 전남 해남 현산면 구시리라는 동네에서 100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아름다운 촌락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이 모년 흉년에 풀뿌리도 말라죽고 산에 도토리도 없어 자식들 배고플 생각에 울 밖에 상수리 3개를 심었는데 그 중에 한 그루가 큰 아름으로 자라 매년 상수리가 할머니 생각처럼 많이 열려 주울 때마다 할머니 생각에 울컥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그리워집니다. 할머니! 그 아름다운 그 시절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내 심정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더 그리워지고 울적해진 마음만이 그 시절을 스크린으로 할머니 곁에 있게 합니다. 할머니께서 저 멀리 이민 가시던 그 날 저와 아버지께서는 못네 아쉬워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면서 자식과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함을 울음으로나마 제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할머니 증손자 의석이는 철부지인지라 할머니와의 긴 이별도 아랑곳없이 뛰어다니며 놀고있었지요.
할머니 보고싶어 벌써 할머니 못 본지가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어요. 어쩔 때는 근무 중에도 저도 모르게 할머니 생각에 눈물을 주르르 흐르곤 한답니다. 엄마께서 호통치시거나 때릴 때면 사실 가신 할머니 찾아 엄마가 때렸다고 이르면 누가 우리 큰손자를 때렸냐고 역성들 때면 저는 전쟁에서이기고 돌아온 장군처럼 의기 양양해 하며 할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앞뒤고 흔들면서 마당에 들어섰지요. 그때 할머니께서 안방에 들어가 사내가 입 가볍게 이른 버릇하면 못쓴다고 가르쳐주시던 할머니...
초등학교 2학년때 숨박꼭질하다 술래를 피하기 위해 2층에서 뛰어내리다 오른쪽 발목을 삐여 몰래 누워있을 때 이 녀석이 무슨 일을 저질렀구나 하시면서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더니 저를 업고 동네 아저씨에게 가서 삐었던 발을 맞춰주셨던 할머니 제가 커서 할머니를 업어드려야지 생각했는데 이젠 꿈이 되어버린 현실이 너무도 아쉽습니다.
할머니 가시던 날 생각나십니까? 할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다 챙겨드리고 아름다운 여행차 까지 준비하여 길도 새로 내시고 가로막는 나무도 손수 베어 할머니 가시는 길을 못내 아쉬워 아름답게 꾸며 주시던 것을 할머니 저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이 편지를 쓰면서 할머니 생각에 저는 눈물이 흐를까봐 할머니를 미워도 해보고 할머니 생각을 잊으려고 노력도 해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에 대한 동정과 할머니 사랑이 또렷하게 더욱더 선명해져 제 두 눈은 어느새 감출 수 없는 눈물이 돋보기에 얼룩져 글마저 번져갑니다. 할머니 손자나이 벌써 쉰을 바라보는데 아내와 자식들이 볼까봐 다 잠든 한밤에 이 글을 씁니다. 몇 년 전만 해도 할머니를 보시면 그 날 기분이 좋고 무엇이든 뜻대로 됐는데 이글래에는 할머니께서 보여주시지를 않으니 혹시 이 손자를 잊으셨는지요. 약속이 늦어 화가 나셨다면 용서 하십시오. 할머니 손자가 할머니처럼 아름답게 살려다 보니 너무도 바쁘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려운 시절 가난에 굶주린 사람들을 생각하시며 한평생 살아가셨던 할머니 끼니 걱정을 하면서 사는 마을 아주머니들이 상고 들면 없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으시고 쌀 한 됫박과 언제 사놓으셨는지 미역을 들고 가실 때마다 큰손자를 부리시면 손자녀석은 할머니 치맛자락을 손으로 잡다 때로는 입으로 물기도 하면서 금줄 처 놓은 집에 들어가 쌀 됫박 위에 미역을 올려놓고 밥을 지으시고 미역국을 끓이시면서 얘기 낳고 딱딱한 보리밥을 씹어먹으면 이빨이 못쓰게 된다고 하시면서 쌀밥 지어 먹이시라고 일러주시던 울 할머니...타지방에서 행상 나오신 분들이 하룻밤 묵고 가자 시면 누추하지만 여기서 같이 자시라고 허락하시곤 시장하면 장사도 안 된다고 김치와 밥상을 보아주시고 따뜻한 국물에 요기하시라는 인사와 함께 아궁이에 불을 지펴 따뜻한 방과 마음을 전해주시던 울 할머니... 미친 사람이나 거지가 다떨어진 옷을 입고 덜덜 떨며 구걸할 때는 헌옷도 꺼내 입혀주시고 자기가 먹던 밥이라도 요기하라고 건네 주시는 울 할머니... 학창시절 소풍갈 때면 "남은 음식을 버리면 죄된단다". 일러주시며 남들이 음식물 버리면 도시락에 담아와서 돼지나 짐승을 주라고 가르치신 울 할머니... 저는 할머니 가르침을 존경하오며 할머니처럼 살아가겠습니다. 할머니 오늘 밤 제 방에 잠깐 살며시 다녀가십시오 무럭무럭 자란 증손자 녀석들도 보시고요. 너무나 보고싶은 그 얼굴 그 모습 엉엉 울어도 뒷목이 뻐근하게 저려와도 그칠줄 모르고 흐르는 이 눈물은 애타게 그리는 할머니 그때 그 모습을 모고 싶어 아니 영영 보지 못함이 더욱 안타까워 더욱더 그리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잔칫집에서 곱게 한복을 입고 북과 장구에 맞춰 팔에 율동과 무릎에 오금을 잡아가며 아름답게 춤을 추셨던 울 할머니...이 큰손자 할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영원히 할머니처럼 살아가겠습니다
임현정--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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