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응원군
주진익
2000.12.17
조회 36
이프로를 듣노라면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네 부모님들이 어렵게 살아온 삶의 모습과 내일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것 같아 더욱 애착심과 동질 감이 느껴져 사연을 보내고 싶은 충동 참을 수 없어 이렇게 글을 써봅니다.
어머님의 살아오신 주옥같은 나날들이 우리 형제가 성장한 오늘에 전설 속에 묻히는 것이 아까워 어렸을 적 경험의 한 토막의 글을 전파에 띄어봅니다.
차령산맥의 험한 줄기 마지막 자락에 자리잡은 하늘 아래 일 번지에서 딸딸딸 들들들 육남매가 태어났습니다.
가난 때문에 누님들은 초등학교만 다니고 가발공장과 봉제공장으로 부잣집의 식모로 그렇게 떠났습니다. 태어난 순서와 아들이라는 이유로 형님들과 나는 학교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 명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은 남의 집 논 닷마지기를 짓는 소작농으로는 너무나도 어려웠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말에 어머니와 아버님은 저의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심하게 부부싸움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부싸움의 이유인즉,
"저는 10리가 넘는 먼길의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돌아오는 길이 너무 멀어서 돌아오다가 놀고 놀다가 돌아오고 학교에 다니는 것에만 목적이 있었고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1학년 때 한글을 해득해야 하지만 왼지 한글의 해득이 그렇게 어려웠습니다. 저녁이면 형님들이 ''가갸거겨'' 조금씩 가르쳐 줬지만 2학년이 되도록 한글을 전혀 쓰고 읽을 수 가 없었습니다.
2학년부터는 나머지 공부라는 단골손님이 저를 반기고 있었고 창피하다는 생각도 못하고 그저 4학년 때까지 부진아로 초등학교에 다녔습니다.
5학년이 되서야 겨우 한글을 깨다보니 성적표는 여전히 양가가 판을 쳤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제법 공부를 하는 형님들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세 명을 공부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었든지 한글도 잘 모르고 공부도 가장 처지는 막내는 중학교를 보내지 말고 조그마한 지게를 만들어서 한 삼 년 농사일을 거들고 친구들이 중학교 졸업할 정도에 서울에 공장에 보내어 기술을 배워야 제 밥벌이는 한다는 것이 아버님의 주장이셨고, 어머님은 요즈음 중학교 안가는 머슴애들이 어디 있으며 한글을 좀 늦게 깨고, 지금 공부를 못한다고 중학교를 안 보내는 것은 평생 자식의 가슴에 못을 박는 짓이며 이놈이 커서 공부 잘 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중학교는 무시험 전형이니 일단 입학시켜보고 고등학교 떨어지면 공장에 보내자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와 안방에서 잠을 청하면서 나는 눈물이 핑 돌았고, 속으로 어머니를 응원하였습니다.
응원군의 덕분인지 어머님의 강한 주장 때문인지 몰라도 아버님은 뜻을 굽히셨고 20리가 넘는 중학교에 영광스럽게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다짐을 하였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자, 그리고 중학교에 가면 새로 배우는 영어와 한문은 남보다 뒤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배우는 영어와 한문은 기초를 쉽게 풀이한 참고서 없이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 여유가 있어 참고서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과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이었습니다.
친구가 참고서를 사러 읍내에 나간다기에 친구의 자전거 뒤에 타고 같이 갔습니다.
친구가 참고서를 고르고 있는 동안 같이 서점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빛을 찬란하게 발하고 있는 영어와 한문 참고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도 모르게 슬며시 참고서 있는 곳으로 가서 슬쩍 참고서를 훔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발각되어 죽도록 맞고 학교에 연락하여 태학을 시킨다고 인적사항을 적어 놓고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집에 와서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들어간 중학교인데 1학년초에 태학을 당하다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엉엉 울면서 하느님 앞에 기도를 하였습니다. 한번만 용서하여 주신다면 다시는 나쁜 짓을 않고 착하게 살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하면서 눈물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해질녘에 어머님께서 일터에서 돌아오셨고, 방안에 있는 막내가 궁금했든지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애써 눈물을 감췄지만 퉁퉁 부어오른 눈을 보고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초지정을 말하라는 어머님의 말씀에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흐느끼면서 낮에 있었던 서점에서의 사건을 모두 이야기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네가 무슨 죄가 있겠냐, 가난해서 참고서 한 권, 교복 한 벌 제대로 사주지 못하는 네 부모의 잘못이 크다고 말씀하시며 어머님도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도 같이 울고 집안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한 참을 우시더니 걱정하지 말라고 어린 저를 위로하시더니 옷을 입고 급하게 어디론가 가셨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늦은 밤이 되서야 참고서가 든 쇼핑 빽을 드시고 아주 지치신 모습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돌아오셔서 형님들과 저를 앉혀놓고 가난한 가정에서 배우기는 어렵지만 거짓말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필요한 것 있으면 꼭 이야기하고 너희들은 집안 걱정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하는 길이 부모님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굳게 다짐을 하였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랫집에 가셔서 돈을 꿔 가지고 20리 길을 단숨에 달려가셔서 서점주인에게 백배 사죄하고 자식의 용서를 빌고 돌아오셨던 것이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학기초에 서점으로 책을 사러갔습니다.
책을 골라서 계산대 앞으로 갔을 때 주인아저씨가 잠깐만 보자고 하시더니 옆의 빵집으로 데리고 가서 3년 전 어머니께서 사죄하러 왔던 이야기를 하시면서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니 공부도 열심히 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빵을 사 주시고, 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참고서 걱정은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점 사장님의 격려와 부모님께 효도하는 방법을 찾아 열심히 공부를 하여 사범대학에 입학하였고, 지금은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근무하는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어머님께서 벌써 팔십이십니다.
삼십년전 부엌에서 목욕하다가 연탄가스로 식물인간처럼 살아가는 둘째 딸을 항상 안타까워하시면서 나보다 먼저 네가 죽어야 내가 눈을 감고 죽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아들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시려는 어머님의 하늘같은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엊그제 아버님 생신 때 큰집에 모여 조촐한 잔치를 해드린 자리에서 나이 팔십 살았으면 너무 많이 살았다 이제 그만 앓지 않고 편안하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눈가에는 이슬이 맺히셨습니다. 노동력이 없어 세 아들이 생활비를 모아서 주는 돈을 쓸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의 사랑에 자꾸만 적어지는 내 모습을 느끼게 됩니다.
어려운 살림에 자식들을 고등학교 대학까지 가르치시고, 얼마 남지 않은 삶도 항상 자식을 생각하시는 어머님의 사랑에 항상 감사드리며 살아 계시는 동안에 작은 정성으로 큰 효도를 하겠다고 다짐하여봅니다.
항상 어머님과 아버님의 중학교 진학을 앞둔 싸움에서 승리하신 강임함과 한 때의 실수로 참고서를 훔치고, 어머니의 사죄로 고등학교 내내 공짜 참고서로 공부했던 옛 추억을 잊지 않으면서......
처음 그 웃음을 부탁해-최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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