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냉장고여 영원하라
이장식
2000.12.12
조회 36
최근 있었던 일을 알려드리지요. 이야기는 바로 그놈의 김치냉장고 때문에 생긴 일이랍니다.
워낙 자상하시고 꼼꼼하시고 깔끔하신 아버지와 그에 비하면 좀 털털하시고 통 크시고 화끈하신 엄마, 그래서 경제적인 주도권은 아버지께서 맡고 계시지요.
그런데요, 저희 엄마는 살림욕심이 많으시거든요, 주부라면 누구든지 그럴거예요. 좋은 음식, 좋은 물건 나오면 사고 싶고, 식구들 해주고 싶고,
김치냉장고라는게 처음 세상에 나왔을때 부터 엄마는 그게 그렇게 탐이 나셨답니다. "와! 저거 대게 좋다. 우리도 저런거 하나는 꼭 있어야 되는데...그지? , 우리집에 꼭 필요한 거야, 아니야 우리집 사라고 나온거야 저거는..." 테레비젼에 광고라도 나올라치면 엄마는 저를 붙들고 아니면 아들들을 붙들고 군침을 흘리곤 하셨죠. 하지만 살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IMF덕분에 실직했다가 겨우 자리잡고 있는 큰아들내외한테 사달라고 하기는 좀 그렇게 나머지 아들들도 뭐 이제 학생이구 군인이고, 푼돈모아 사기에는 너무 덩치가 크구요.
그러던 차에 기회가 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엄마이름으로 신용카드를 하나 만들어주신거죠. 혹시 집에 혼자 있거나 갑자기 급한일 있을 때 쓰라구 말이죠.
그날부터 엄마의 눈은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무슨무슨 홈쇼핑이나 무슨무슨전자에서 김치냉장고 광고만 나오면 일일이 비교하시고.. 아버지가 안계신 기회를 틈타 여기저기 쓰고 있는 사람들한테 전화해서 물어보기도 하시구요
"쓰니까 어때? 좋지? 좋아!... 그렇겠지, 암 그렇구 말구"
엄마얼굴에선 웃음이 끊이질 않았구요. 지켜보는 저는 좀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금방들통 날텐데. 아버지가 가만히 안계실텐데....카드청구서나오는건 둘째치고 부모님집이랑 저희집이랑 5분도 안되는 곳이고, 수시로 왔다갔다하시는데요.
제가 아기낳으러 가기 일주일전... 바로 그날 사건은 시작되기 시작했지요.
"숙아! 우리 어디 산책가자" 하시던 엄마는 배불뚝이 저를 끌고 김치냉장고를 사러 가셨습니다. 혼자서 일을 저지르기엔 좀 뭐하셨죠. 혹시라도 일이 커지면 임신한 제가 큰 방패막이 되지 않겠습니까? 엄마하시는 일에 전 한마디도 토를 달지 못했습니다. 애 둘 엄마되는 며느리 편하라고 사시는 걸텐데 말입니다. 또 어부지리로 살림 얻는 재미도 있었구요. 그래도 걱정은 되었죠.
엄마는 어느새 그렇게 많은 시장조사를 하셨는지 판매원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건 어떤 기능있어요? 이건 용량이 어떻게 되요? 아! 이게 바로 그거구나, 에이~ 이건 안좋다던데...."
들어간지 십분도 않되서 저는 김치냉장고 카다로그랑 신용카드 영수증 그리고 배달전표를 들고 집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냥 어디 번개한테 얻어맞은 기분이였어요. 그런데요. 이제부터 문제죠. 그 큰 덩치의 냉장고를 어디에 숨기느냐구요. 아버지가 집에 못오게 어떻게 하시냐구요. 엄마는 제 걱정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야! 몰라 사고치는거야 그냥. 내가 뭐 결혼 30여년에 이런거 하나 못사! 뭐라그러기만해 내가그냥 집 나가고 말어....." 엄마는 그냥 기분이 좋으셨습니다."니 아버지 하늘이(우리 네살짜리 큰 아들입니다.)때문에 정신없다고 여기 잘 안오셔! 걸리면 그때가서 생각하지뭐...."
다음날 오후 그 커다랗고 하얀 물건은 저희집거실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습니다. 덩치고 얼마나 큰지 지나가던 동네사랃들이 다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어머,이집에 김치냉장고 들여놨네. 좋겠다..." "응~. 내가하나 사줬어. 이집 식구 많은데 어디 김장해서 놓을때가 있어야 말이지." 엄마는 물어보는 사람마다 아주 뿌듯하게 말씀하셨답니다. "숙아! 걱정하지마, 아 한달있어야 청구서나오고 그럼 니아버지가 어쩔거냐? 한달쓴거 물러오라고 하겠어? 그냥 배째라고 하는거야..."
엄마는 큰일 저질로 놓고 그래도 걱정은 되셨는지 중간중간 그렇게 말씀하곤 하셨지요. 하지만 제마음은 뭐 그런가요. 바람결에 대문만 흔들려도 혹시 아버지가 오시나 말씀안드려도 어떤 마음일지 아시겠지요?
그러던 중에 전 아이를 낳으러 병원엘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수술날짜 잡아놓고 입원한 터라 그래도 느긋한 마음으로 집안살림은 송구스럽게도 엄마께 맡기고 갔답니다. 그날밤 그야말로 클라이막스 절정의 순간이 다가온거죠. 저는 그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후에 엄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며느리 병원에 보내놓고 엄마는 집안대청소를 시작하셨답니다. 배부른 며느리 제대로 못하는 살림을 챙겨주시느라 저녁때를 놓치고야 말았지요. 후딱 저녁을 준비하고는 아버지께 전화를 하셨답니다. "여기 저녁다 해놓았어요. 밥가지고 지금 올라갈께요" 그런데 아버지 대답은 "아니야! 힘든데 내가 내려갈께" 쿠과광 엄마 가슴에 천둥번개가 쳤습니다. "아니예요, 얘들도 아직 안왔고 내가 가지고 갈께요" 하지만 아버지는 벌써 전화를 끊고 나신 후였습니다. 밥상을 차리는 엄마 손이 무척이나 떨렸답니다. "뭐, 어차피 알건데... 설마 도로 가져가라고야 하겠어? 괜찮겠지뭐..."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혼잣말로 진정시켜가메 그렇게 5분? 드디어 아버지가 오셨습니다. 무심코 대문열고 거실을 성큼성큼 들어서신 아버지는 밥상앞에 앉으셨습니다 "애들은 언제 ..." 아버지 말씀이 갑자기 끊겼답니다. "저거 뭐야? 여보 저거 하얀거 뭐야?" 아주 자상하신 목소리로 아버지께서 물으셨답니다. 엄마는 그냥 못들은척 밥상을 차리셨지요. 수저를 놓고 저분을 놓고... "이거 뭐냐구 제법 큰데 이거 세탁기야?" 아버지는 냉장고 앞으로 가셔서 좌로 3보 우로3보 물건을 살피기 시작하셨구요. 우리 엄마 이젠 어쩔수 없다 싶으셨지요. 그냥 먼산 바라보시면서 아주 조그맣게 그리고 얼버무리는 목소리로 "냉..장.. 고..." "뭐? 뭐라구 냉장고 저기 냉장고 있잖아?" "아니... 김치 냉장고..." "무슨 냉장고? 아 김치... 근데 이거 어디서 났는데...누가 줬어? 아니면 누가 사줬나?"..... 엄마는 이제 용기를 좀 내셨습니다. "사주신 누가 그런걸 사줘? 샀지" 아버지 눈은 삽시간에 커다래지셨고.. "돈이 어디었어서?" 엄마는 이젠 된대로 되라 였습니다. "아 카드로 샀지 돈이 뭐 그렇게 있나? 꼭 필요해서 샀어. 김장도 넣어야 하고 애들애미 힘도들고 또....." 엄마이 변명아닌 정당한 사유는 그렇게 5분여간 설명되었고....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엄마는 속으로 생각했답니다. ''이젠 죽었다. 혹시 소리지르면 어쩌지? 그냥 나가버리면 어쩌지'' 다음 상황에 대비해 생각도 정리해두고 받아칠 말도 생각해보고... 드디어 엄마 말씀이 끝났는데.... 아버지는 그냥 밥상에 가셔서는 식사를 하시더랍니다. 아무말도 없이 그냥..... 그리고 일주일후 제가 돌아왔죠. 전 무사히 그자리를 지키고 있는 냉장고를 보고 사실 좀 의아했습니다. 아버지는 더이상 그일에 대해 한마디도 없으셨으니까요. 아이 낳고 한달.. 우리집 김치냉장고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김장김치까지 꽉 채워놓고 잘 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말씀하십니다. "아니야. 그럴 양반이 아니야... 혹시 아무도 없을 때 도로 가져다 주지 않을까? 아닌데.....그냥 있을 양반이 아닌데..."
그렇게 그 사건은 미결로 그냥 남아 있습니다. 저는 바랍니다. 우리집 김치냉장고가 쭉 그자리에 영원히 남아있기를 ...
MAGIC WOMAN-이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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