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금융기관이라는 직업 특성상 라디오를 매일 들을 순 없지만 가끔 주말에 집에가는 버스에서 기사아저씨들의 선처로 이따금씩 시원한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농땡이 청취자 입니다.
웃을때마다 "나도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일이 있던가?"를 생각하며 머리를 정리해 보곤 했죠. 사실은 시집갈 때인지라 선물이 탐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전국에 계신 아버지, 남편분들이 이런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시길 바랄 뿐입니다.
저희 아버진 농촌에 계십니다. 아버지의 체면상 신상은 밝힐 수 없음을 머리숙여 사죄 드립니다. 일찌기 넓은데서 공부를 시키기 위해 저희 딸둘(제가 맞이입니다), 아들 하나는 책가방만 들고 포항으로 나왔구요, 그러다 남동생이 군에 간 틈을타서 엄마도 나오셨습니다.
졸지에 부인있는 홀아비가 된 것입니다. 울 아부지...
그래도 워낙 책을 좋아하시고 편지도 곧잘 저희 이름 앞으로 보내시는 성격이라 혼자가 외롭지만은 않으신가 봅니다. 아니 그동네 부녀회원들이 아버지 펜클럽일 정돕니다.
엄마는 "너그 아부지 죽으면 딴거 하나도 안하고 집에 있는 그 책 길거리에 놓고 한권에 500원씩만 받아도 내 평생 먹고 살지싶다"라고 그러실 정도로 책을 좋아하십니다.
제작년 여름입니다.
엄마랑 집엘 갔습니다.
밥하러 주방에 들어가신 엄마"수여이 아부지요, 이 냄비 두껑이 와이른교?"
아버지 주방에 들어오시며 그때를 기억하십니다.
두분 그 인상을 꼭 보셨어야 하는건데 말입니다.
"아이고, 말도하지마라 막내 누나가 내 혼자 밥묵는다꼬 전기냄비 쓰지말고 여기다 밥 해묵으라 그래가 밥했다가 내 시껍 묵읐다."
"와요?"
"아이고 밥해가 가스빼라 그래가 뺀는데도 뚜껑이 안열리쟎아. 그래가 뜨겁은거 식힌다고 아무짓도 몬하고 그것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가, 식고나이 이래도 안열리고 저래도 안열리고 배는 고프고 약은 오르고 그래가 우야노, 내 퍼무지고 앉아가 두발로 밤솥 붓들고 망치같고 때렸다 아이가 아이고 말도하지마라"
엄마랑 저는 그 상상만 해도 웃기는 겁니다.
자지러질때로 웃고나니 은근히 죄송스럽드라구요.
두분 생각해 보세요. 남자가 압력밥솥 붓들고 말치로 두들기는 장면을요.
그 뺀다고 뺀 것이 김이 덜 빠졌었나 봅니다. 그러니 압이차서 뚜껑이 안 열린 ㄱ거구요.
그렇게 망치로 두들기다 보니 압이 빠졌겠죠. 그러나 두껑은요?
완전히 6.25때 포탄맞은 냄비였습니다.
엄마도 웃다가 미안했는지 그냥 편한 전기밥솥에 하라고 맛이 얼마나 차이난다고 그 난리를 부렸냐며 잔소리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밥을먹고 난뒤 머리를 감는데 샴푸가 없는겁니다.
"아빠 샴푸없어요?"
"와 잘찾아봐라 거 있다"
잘 찾고 말고 남자 혼자뿐인 욕실에 있는건 뻔했습니다.
세탁기 옆에 있는 세제, 락스, 비누, 그리고......울샴푸
아차 울샴푸. 아빠가 있다는 머리감는 샴푸가 그것이었습니다.
샴푸는 샴푼데 머리감는 샴푸가 아니라 섬유유연제를 저희 아버지는 반통이나 넘게 머리감는 샴푸로 쓰신겁니다.
표지에 예쁜 옷그림도 그려져 있더구만 참...
웃음을 참지 못했지만 아까 그 밥솥에 이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저희 두 분 아직두 쟁쟁하십니다. 도시에서 살아본 여자와 농촌에서 절대로 더날수 없다는 남자는 아직도 서로가 굽히고 들어 올 것을 기다리며 따로 과부아닌 과부로, 홀아비아닌 홀아비로 살고 계십니다.
그래두 두분 애정전선에는 이상이 없답니다. 서로의 생일전날 미리 힌트도 주시구요, 어버이날엔 "난 신경쓰지말고 너그엄마 포항에서 젤로 예쁜 꽃 달아드려라"고, 또 생일날엔 꽃배달도 온답니다.
엄마는 또 어떻구요. 아버지 생신이면 어시장을 한바퀴 다 돌아도 꼭 맘에드는 큼직한 칼치사서두분 오랫만에 따뜻한 밥 드시고 자식들 없는 촌집에서 신혼여행을 다녀오듯 보내고 오십답니다.
이제 겨우 결혼할 나이가 디어서인지 두분의 그런마음을 배우고 싶고 또 멀리 계시지만 정답게 사시는 두분 저희가 빨리 결혼을 해야만 한 집에서 모실수 있는 날이 올 것 같아요.
그 때까지 두분 모두 건강하시구요.
전국에 계신 남편, 아버지 여러분.
압력밥솥은 압을 다 빼야 잘 열리고 또 억지로 열린다손 치더라고 밥들이 다 공중으로 날아가는 경우도 생긴답니다. 그리고 머리털과 섬유는 설사 비슷할 지언정 세제는 따로 나온답니다.
전 그날 이후 전기 압력밥솥을 사드렸답니다. 자동으로 김을 빼 주는밥솥이요.
제 이야기가 추운날에 좀 도움이 되었나요?
추억-박지윤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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