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결혼한지 1년 반이 조금 넘은 주부랍니다. 또한 8개월 된 아주 귀여운 사내아이의 엄마이기도 하지요. 지금은 아이 키우랴, 살림하라, 남편 사랑해 주랴, 정신없이 살지만 결혼 전 저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였답니다.
제 나이 스물 일곱! 꽃다운 처녀시절도 시들기 시작할 무렵, 어느날 동네 할머님께서 저희 집에 놀러 오셔서는 그러시더군요. 더 나이 들기 전에 빨리 시집가야 한다고요. 저는 그 당시 가깝게 사귀는 남자친구도 없었고, 또 그렇게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께서는 저희 집에 오실 때마다 절 보시곤 꼭 한마디씩 하시는게 아니겠어요? 제 눈가에 주름이 보인다, 몸매가 망가진다. 나이 드니까 피부가 퍼석퍼석해 보인다....... 하여튼 제 속을 확 뒤집어 놓고 가시더군요. 그런데 문제는요.. 그 할머님이 가시고 나면 그 다음엔 저희 엄마가 제 속을 확 긁어 놓으시는 거예요. 나이는 먹을대로 먹어서 변변한 애인도 없느냐, 누구누구는 연애 잘 해서 좋은데로 시집만 잘 가더라 등등 매일매일 그런 소릴 듣고 사니 정말 우울하고 신경질만 늘더군요.
그렇게 한해가 저물어 가는 1998년 12월! 그 할머니께서 저희 집에 오셔서 그러시는 거예요.
"내 먼 친척 조카뻘 되는 애가 있는데 아직 총각이야. 참 괜찮은데 한번 만나볼 생각 없어? 내가 생각해서 소개시켜주는 거니까 만나봐."
저요. 괜찮다고 딱 잘라 거절했지요. 그러자 그 할머니, 거의 매일 같이 오셔서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시는 거지 뭡니까? 안 만나면 후회한다. 그런 남자 세상에 없다. 나이 많아 이젠 선도 안 들어 올거다.
결국 저는 그 할머니의 끈질긴 협박과 저희 엄마의 매서운 잔소리로 인해 그 남자를 만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드디어 선보는 날! 그 남자가 그러더군요.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다고요. 앞으로 뭐해 먹고 살거냐니까 사업을 할 거라데요. 전 선보는 날, 그런 얘길 꺼내는 그 남자가 참으로 황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전 그 남자의 차분하고 솔직한 모습에 자꾸 마음이 끌렸습니다.
결국 저와 그 남자는 만난지 한달 여 만에 양가 인사를 드리게 되었고, 결혼 날짜까지 잡게 되었습니다.
해가 바뀌고, 1999년 5월! 저는 결혼식을 앞두고 경복궁에서 야외촬영을 했습니다.그리고 저와 그 남자는 저를 도와 준 제 친구들에게 성의의 표시로 그날 저녁과 술을 사고, 마지막으로 노래방엘 갔었습니다.
모두들 많이 취해 있었고, 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그 남자와 부루스까지 춘 저는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고는 밖엘 나왔습니다. 술이 깨질 않아서 바람을 쐬러 나온 거였지요.
그런데 잠시 후 제 친구들이 나오더군요. 저와 결혼 할 그 남자는 안에서 계산을 하고 나올 거라길래 기다리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질 않는 거였습니다. 저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 남자를 찾으러 2층인 노래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다 올라가서는 그만 계단 끝 모서리에 발이 걸린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안 넘어지려고...., 안 넘어지려고 앞으로 몸부림을 치며 달려가다가 그만 노래방의 두꺼운 출입문 유리를 제 머리통으로 와장창 박살을 내고 말았습니다.
계산을 하고 있던 그 남자와 노래방 주인은 깜짝 놀라서 뛰쳐나왔고, 바닥에 벌러덩 누워 있던 저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문을 박살낸 저는 그 남자를 안심시켰습니다.
" 괜찮긴 뭐가 괜찮아? 머리에서 피가 나잖아!"
그 남자의 말에 제 머리를 만져보니.... 에그머니나, 시뻘건 피가 줄줄 흐르는게 아니겠습니까?
바닥은 깨진 유리조각들로 널려져 있고, 노래방에 있던 사람들은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모두들 뛰쳐나와 있더군요.
그런데 갑자기 제 몸이 번쩍 들어올려지더니 막 달리기 시작하는 거였습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 친구들은 저를 엎고 뛰어나온 그 남자를 따라 영문도 모른 채 같이 달려야 했습니다.
병원은 200m도 넘는 거리에 있었고, 그 남자와 제 친구들은 "비켜! 비켜!"를 외치며 사람들 틈을 헤치고, 정말로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야 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한 저는 급히 응급실로 들어가 머리를 여섯 바늘이나 꿰메고서야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와 보니 장난이 아니더군요. 모두들 땀에 흠뻑 젖어서는 있는데로 저를 노려보고 있었고, 저를 엎고 온 그 남자는 거의 탈진상태에 빠져 복도에 있는 이동침대에 누워 일어나질 못하는 거였습니다.
하여튼 병원을 나와 저를 본 친구들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들 돌아갔고, 그 남자는 저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습니다.
그 남자와 헤어지고 집에 들어온 절 보신 저희 부모님은 당연히 놀라셨겠지요.
"너...너... 왜 이래?"
"응... 야외촬영하다가 넘어졌어요."
저의 거짓말에 부모님은 그냥 넘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다칠떈 정말 하나도 안 아펐는데 정작 자려니까 꿰멘 부분이 욱씬욱씬 쑤시는게 너무나도 아픈 거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에는 들리지 않게 이불을 뒤집어 쓰고는 엉엉 울었습니다. 그때 전화가 울리더군요.
"난데.....머리는 괜찮아?"
그 남자가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한 것입니다.
"응... 좀 아프지만 괜찮아. 자기 많이 놀랐지?"
"내가 너 어떻게 되는줄 알고 얼마나 똥줄 빠지게 뛴지 알아? 그것보다도 정신이 없어서 그 노래방 계산도 못하고 그냥 나왔어."
"어머머... 정말이야?"
"계산도 계산이지만 그 유리값도 변상 못하고 그냥 나왔네."
"어머머, 어떻해?"
"어떡하긴 내일 변상해야지. 하여튼 잘자!"
전화를 끊고서야 저는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큰일 난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결혼식을 바로 코 앞에 놔두고 저의 뒷통수엔 머리를 꿰멘 자국이 땜빵자국처럼 남아있다는 거였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꿰메느라 잘린 머리카락은 쉽게 자라지 않았고, 상처에서는 조금씩 피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호하셨는지 정작 결혼식 당일 날엔 가발을 써서 꿰멘 자국을 가릴 수 있었고 절 위해 같이 뛰어 준 제 친구들 덕택에 결혼식도 아주 잘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종환, 최유라씨! 걱정하지 마세요. 결혼 후 저희 남편은 사업을 시작했는데 꾸준히 잘 되고 있고요. 저희를 맺어주신 그 할머니께선 저희 친정을 오가시며 이번엔 노총각인 저의 작은 오빠 속을 뒤집어 놓고 계시답니다. 그리고 결혼식날, 제 머리에 피가 말라서인지 이제는 제법 철이 든 아줌마 흉내를 내며 저희 부부,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답니다. 그런데요. 며칠 전에 제 남편이 된 그 남자가 그러더군요.
"그때 그 노래방 있잖아? 내가 그 며칠 뒤에 찾아갔더니 주인이 바뀌었더라고.... 그래서 돈 못 줬어."
이제 그만-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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