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나 공주나 무덤, 나무는 다 같겠지 뭐
이건희
2000.11.17
조회 40
몇 해 전부터 낙엽 떨어지는 가을에서 겨울 무렵 앨범을 뒤지는 버릇이 생겼다.
산뜻한 최근 것이 아닌 낡고 빛 바랜 학창시절의 앨범.
아이들 키우며 정신없이 살 땐 몰랐는데 이제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나고 여유가 생기다 보니 갈래 머리적 소녀 시절이 그립고 친구들이 보고 싶은 모양이다.
여느 해와 같이 사진을 살펴 보다가 한 사진에 시선이 멈췄다. 큰 무덤 앞에서 지는 석양을 뒤로 하고 단풍나무에 기대 선 소녀.
바로 나였다.
문득 그리움이 몰려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저 때에 무엇을 생각하며 꿈꾸고 있었을까?
그때 소망하던 미래가 지금 이런 모습이었을까?
순간 그 추억 속으로 가고 싶은 그 간절함.
그 소녀는 변했어도 저 단풍나무, 무덤, 태양은 그대로 있겠지... 생각해보니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은 공주 무령왕릉이었다.
그래 망설이지 말고 바로 내일 아침, 그리고 혼자 가는 거야..
아침 일찍 식구들은 그래도 다 보낸 뒤 추억을 음미하기 위해 과감히 혼자 공주를 향해 출발했다.
결혼후 처음 가는 혼자만의 여행이라 조금 두려움도 있었지만 가을 여행이니 얼마나 더 멋진가 하는 성취감이 더 컸다.
공주에 들어서니 옛 고도다운 고즈넉함과 정취, 그리고 깨끗이 정돈된 왕릉 주변, 티켓팅을 하고 입장,
빠알같고, 노오란 단풍·은행나무가 곳곳에 장식되어 있었고, 잘 정돈된 무덤들..
이 무덤이었나? 그리고 이 나무?
무덤은 그런 것 같은데 왠지 나무가 너무 그대로인 것 같아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관리소장이라는 분이 내게 다가오셨다.
너무도 한산한 평일 늦가을.
왠 아낙네가 그것도 혼자 별 탐구할 만한 것도 없는 무덤과 나무들을 보는 것이 예사롭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차 저차 말씀드렸더니, 나처럼 수학여행때의 추억을 찾아 이따금 오는 사람이 있다며 기특하게 여기셨다.
"단풍나무가 지금은 한 아름쯤 될 줄 알았는데 다시 심은 건 아닐텐데요?"했더니
"단풍나무는 잘 안 자라는데...이게 30년은 더 된 것 같은데, 그때도 당연히 있었죠"하신다.
그런가 보다 하며 다시 그 나무에 기대서서 이른 낮 시간이라 석양은 아니지만 찬란한 가을 태양 아래서 잠깐이나마 추억을 되새기는데 별 감동이 없이 "정말 무덤만 많네"하고 생각하니 몇해전 가고 싶다고 남편에게 말 했을때 ''맨 무덤뿐인데를 뭘 가? 좋은데가 얼마나 많은데?'' 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됐다 싶어 한 바퀴 더 돌아보고 밖으로 나와 주변도 걸으며, 약간의 뿌듯함을 안고 오후에 출발하여 저녁 느즈막히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그래도 나무가 그렇게 안 자랄 수가 있을까?'' 생각하며 앨범을 다시 살펴보는데 이게 웬일?
내가 본 사진은 여고때 수학여행으로 갔던 경주 ○○ 왕릉 앞.
내가 다녀온 곳은 여름 때 수학여행으로 간 공주 무령왕릉.
사진 속의 단풍나무가 오늘 보고 온 단풍나무 보다도 더 큰 듯 했다.
에그머니나!
장소는 구별을 못한다해도(무덤이나 단풍나무는 거의 같으니) 아니, 왜 헤어스타일 단발과, 갈래머리, 교복! 이 확연한 차이도 구별 못했을까... 아이고, 이 답답이...
"혼자 즐겁게 잘 다녀왔냐?"고 약간은 빈정대는 듯한 남편과 아이들의 발랄한 질문에 "응! 좋았는데 그래도 추억은 그냥 추억 그대로가 좋은 것 같애"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해 보았다.
경주나 공주나 무덤, 나무는 다 같겠지 뭐!
섬아이-한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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