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집 밑으로 절이 하나 있습니다. 그 절 마당에 있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오늘 저를 감동시키네요. 아침에 환기를 위해 베란다 문을 열면서 그만 아! 하고 탄성이 나와 버렸어요. 얼마전까지만 해도 꼭대기에만 살짝 노란 물이 들기 시작하더니 며칠 무심했던 사이 밑으로까지 내려 와 나무 전체가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자신만 변하는 것으로는 양이 차지 않았는지 마당을 자신의 노란잎으로 가득 덮고 있었습니다.
물끄러미 은행나무를 바라보고 있는데 감동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쓸쓸한 기운때문에 진저리를 치며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어요. 비단 싸늘해진 날씨 탓 만은 아니였지요. 그 황홀한 빛의 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 올거라는 걸 몸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기운으로 그럭저럭 숨겨져 있던 아픔들이 몸에 찬기가 스치면서 생생히 드러날 거라는 걸 벌써 몇 년의 경험으로 몸이 먼저 느끼고 있었습니다.
겨울...
저는 겨울하면 엄마를 중환자실에 눕혀 놓고 맞이 했던 아버지 생신이 떠오릅니다. 처음으로 끓여 보는 밍근한 미역국에는 파가 동동 떠 있었습니다. 후에 알았어요. 미역국에는 파를 넣는게 아니라는 걸요.
겨울하면 마음부터 추워지는 이유가 아마 그 때문일 거예요. 엄마를 보내던 그 해 겨울을 겪으면서 우리 가족 모두가 그렇게 되버렸지요.
사랑하는 아버지!
불쑥 써 놓고 보니 쑥쓰러워 피식 웃음까지 나오려고 합니다.
''사랑하는''이니 ''아버지''니 하는 표현말이예요. 이런 글이 아니라면 절대 내 입밖으로는 낼 수 없는 단어들이란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도 오늘은 용기를 내어 슬그머니 한번 불러보려 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그럴 줄 알았어요. 벌써 눈물이 핑~ 돌면서 콧날이 찡~ 해집니다.
왜 나에게는 아버지란 이름이 눈물을 돌게하는지, 왜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까지 먹먹해지는 아픔이 느껴지는지, 나에게 아버지는 눈물이고 가슴아픈 존재야 하는 것이 싫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다 옛날 일이지만 말이예요. 하긴, ''다 옛날 일이야'' 라고 말은 하지만 ''다 옛날일''이 되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 아버지는 부모 노릇 제대로 못했다며 많이 아파하시겠지요? 그러나 눈물이고 가슴아픔이고 하는 것은 다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 겨우 알아가고 있어서 감히 드리는 말씀이예요. 용서하세요.
서로가 서로를 이토록 사랑하는 가족이 우리 말고 또 있을까 싶습니다. 정작 얼굴을 보면 별일 없냐는 안부 한마디 따뜻하게 묻지도 못하지만 서로를 쓸고 있는 눈빛속에는 얼마나 끈끈한 사랑이 있는지 이제야 겨우 알겠습니다.
아버지!
언젠가 숙부께서 약주를 하시고 옛날 얘기를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작은아버지가 어린 소년의 아버지를 그리고 학생 때의 아버지와 청년 때의 아버지를 얘기하셨습니다. 숙부의 기억 속의 어린 소년 아버지는 숙부를 지켜주는 아주 듬직한 방패였고,(아버지 동생이라는 이유로 동네 누구든 숙부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학생 때의 아버지는 술취한 할아버지를 읍내에서 집까지 엎고 오실 정도의 효자셨습니다. 숙부 말씀에 할아버지 또한 그런 아버지가 자랑이셔서 일부러 읍내까지 나오라 이르시는 일도 자주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청년 때의 아버지는 이웃 마을까지 소문이 난 한량이였다고도 했습니다. 그때 술이 거나하신 숙부는 추억에 잠기셨지만 그때 저는 지금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왠지 모를 서글픔으로 솟는 눈물을 참느라 혼이 났었습니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그저 저의 인생에 있어서의 아버지셨습니다. 그러다 비로소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어요. 아버지는 아버지 인생의 자신, 즉 주인공이라는 것을...
올 해가 아버지 환갑이십니다.
여느 다른 분 같으면 손자 손녀 거느리고 잔치라도 버려야 할텐데 아버지는 이제 겨우 큰딸을 여의셨으니 제가 죄스러워집니다. 고생 끝내시고 자식들 밑에서 편하게 누리고 사셔야 할 때인데 아직 한창 거둬야 할 동생들 때문에 힘겨워하시는 아버지 생각을 하면 제가 죄스러워집니다. 때 맞춰 여행이라도 보내드렸으면 좋으련만 그럴 형편이 될지도 모르겠어서 더욱 죄스러워집니다.
아버지는 이제 다른 종류의 감정으로 눈물이고 아픔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아버지에겐 슬픔이겠지요? 용서하세요.
아버지!
설겆이를 하다가 갑자기 결혼식이 끝나고 저의 손을 몇번이고 잡았다 놓았다 하시던 아버지가 떠올라 한참을 훌쩍였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그렇게도 아버지 품을 좋아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꼭 손을 잡고 다니려 하고, 아버지가 나갔다 들어 오시면 킁킁거리며 품에 파고들어 냄새를 맡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런 일은 그저 얘기로 전해들었을 뿐 전혀 기억에 없습니다. 기억에 없는 어린시절에는 그랬었는데 지금은 무엇이 그토록 어려워 부드러운 긴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 못 하는지 아쉬워집니다. 그런 아버지를 알기 때문에 아무 말씀없이 손만 자꾸 끌어다 잡으시던 아버지가 더 눈물겨웠습니다.
벌써 결혼 한지 한달이 되어가요. 몇 번 찾아가 뵙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전화를 자주 하지도 못하는 못난 딸입니다. 결혼식 전 크고 작은 일로 많이 속상하게 해드린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마음뿐이고 말로는 잘 표현되지 않아요. 그렇지만 아버지! 다 알고 계시지요? 결혼식날 눈물이 그렁하시던 아버지 눈을 보면서 제게 하고 싶었던 말씀 제가 충분히 알아 들을 수 있었던 것 처럼요.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결혼하면 철이 들어 부모님께 더 잘하게 된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바라시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시지 않도록 잘 살께요. 사실은 이 얘기 하고 싶어 시작한 글이였는데 길어졌습니다.
환갑의 나이에 제 2의 재기를 꿈꾸며 새로운 계획을 하고 계신 아버지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있습니다.
아버지!
무엇보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큰딸드립니다.
Forever-신승훈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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