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금년에 마흔이 된 초보아줌마(?)입니다.
결혼한 지는 16년이나 되고 중3과 초등학교 6학년인 두 아들이 있지만 초보아줌마인 것은 결혼 후에도 내내 직장을 다니느라 살림이나 육아를 시어머님과 남편이 감당해온터라 살림사는 일에는 통 경력을 쌓지 못한터라 그저께 시집온 새색씨마냥 서툴고 어설프기만 해서 그렇답니다.
가요속으로를 들으면서 남들도 다 어렵고 힘든 고비를 넘기고 있구나, 사는 게 다 그렇구나 생각하면서도 저희 가족이 지난 2년사이를 살아온 일들이 너무도 힘들고 꿈만 같은 것이어서 언젠가는 조용히 마음을 정리하고 내 이야기를 써봐야지 생각만 하고 있다가 이렇게 용기를 내어 자판을 두드려 봅니다.
지방 중소도시 출신인 저는 넉넉치 못한 살림살이에 연년생으로 4남매를 두신 농부의 맏딸로 여상을 졸업한 후 은행에 입사하여 근무하던 중 남편을 만나 결혼한 후에도 계속 직장을 다녔습니다.
결혼 이듬해 시아버님이 세상을 뜨신 후 한 집안의 장남인 남편은 이런 저런 사업을 시작했고 아직 젊으신 시어머님이 계셨던터라 굳이 직장을 그만 둘 이유도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았기에 직장생활을 계속해야 했었던 거죠.
그렇지만 유난히 보수적이고 남성우위의 지방도시에서 결혼과 출산을 거치면서 은행근무를 하는 일은 거의 투쟁에 가까운 노력과 때마침 터져나온 결혼에 의한 여직원의 사표강요에 대한 반대 여론과 입법 움직임에 힘입어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로서는 흠이 잡히지 않기위해서라도 더욱 더 열성을 다해 근무를 할 수 밖에 없었고 많은 시간들을 밖에서 보내게 되다보니 집에서 다하지 못하는 제 몫의 일들이 남편과 어머니의 몫이 되었고 또 그런 가족들의 도움으로 전 직장에서 당당히 제 자리를 찾아내고 또 당당한 겨룸을 통해 승진한 전문직 여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동안 남편은 조금이라도 더 잘 해보려고 이것저것 바꾸고 투자하면서 점점 어려워졌고 급기야 IMF의 파고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파산하고야 말았습니다.
그간 은행에 있으면서 제 명의로 끌어다 댄 돈도 상당했고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려는 저희 부부를 도와준 많은 사람들에게도 피해가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직장에서도 전체적으로 감원이니, 명예퇴직이니 하는 분위기가 몰아쳤고 결국 제가 선택할 길은 한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19년동안 하루같이 일상을 꾸려온 직장과의 결별, 작은 중소도시의 특성상 상대의 집에 숟가락이 몇개인지 다 알 정도로 친밀하게 쌓아온 고객들과의 친분을 끊고 내가 알 지 못하는 미지의 시간속으로 삶을 옮겨야 한다는 것, 그것도 내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황에 의해서, 부채라는, 파산이라는 무서운 상황에 의해서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너무나 무섭고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우리 부부나 가족들이 견뎌야 했던 시간들은 "차라리 죽었으면"하는 심정들로 울부짖던 때도 포함하고 있었기에 달리 피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나중에 친정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그랬습니다.
"명의상 이혼이라도 해서 너라도 내 자리를 지키지 그러냐. 남들도 다 그러던 데..."
제가 그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금융기관의 생리상 채무자들이 어떻게 피해가는 지, 어떻게 나름대로 살 궁리를 하는 지 너무나 잘 알지만 "돈"과 "경제"를 희생하더라도 "가족"을 유지해나가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결코 그럴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 퇴직금으로도 결코 다 해결할 수 없는 액수였기에 주변에 크고 작게 피해를 줄 수 박에 없었지만 진심으로 저희 가족을 걱정하는 그 분들의 마음을 안고 고향을 등진 지가 2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씩씩하고 건강한 아이들, 그리고 새로운 삶의 자리를 찾기 위해 열심을 다하는 남편, 언제나 제 마음이 아프지나 않을까, 힘들지나 않을까 염려해주시는 어머니와 여직 함께 살고 있습니다.
흥부네 식구처럼 단칸방에 함께 뒹굴면서도 "어머니. 그래도 우린 잘 살았잖아요. 그리고 이보다 더 나빠질 일을 없으니까 괜찮아요. 점점 나아질 거니까요."라고 위로해 주는 아이들이 있어 따스하고 행복한 집입니다.
때때로 스스로의 처지에 대한 비관도 생기고 힘들어 막무가내 투정을 해도 한결같이 위로하고 다독여주고 미안해하는 남편이랑 함께 사는 한 제 삶이 마냥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물질로, 돈으로 살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우리 가족은 날마다 보고 뜯고 만지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오늘은 제가 새롭게 시작하는 일(서울에 와서 알게 된 친구의 건강식품회사)터의 개업식 날이랍니다.
내가 다시 뛰고 달리게 될 삶의 터전이 될 일터의 개업식날을 위해, 아마도 남편은 지금 김밥을 말고 오징어회를 무치고 돼지 목살을 삶고 있을 거예요.
아내가 새로 시작하는 출발점에 함께 온 손님들을 대접하려고 말이예요.
그 음식들이 남편의 사랑으로 마련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아내는 아마 목이 멜 것 같답니다. 행복으로 말입니다.
(아직 제 이름을 밝힐 용기는 없습니다.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작은 용기가 되고 싶어서 써보았습니다만...)
아들의 애창곡
벅-가면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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