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는 군인이셨습니다.
김기선
2021.08.17
조회 211

2010년에 돌아가신 저의 아버지는 군인이셨습니다. 6·25전쟁의 막바지였던 53년, 아직 전쟁이 끝나기 전에 육군사관학교를 들어가셨고 졸업하시고 소위로 임관을 하십니다. 대위쯤 되셨을 때 월남전을 가시게 되었죠. 월남파병을 마치시고 소령을 달고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라던 강원도 원통 산골짜기의 12사단으로 국내복귀를 하시죠. 제가 음악을 하게 되는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아버지는 매주일 아침이면 가정예배를 인도하셨고 저희 네 남매를 믿음으로 양육하셨습니다. 저의 아버지, 어머니와 비교하면 저의 신앙은 보잘것없을 만큼 특히 아버지는 독실하셨습니다. 그래서 파월 되셨을 때도 기독장교회(OCU) 활동을 열심히 하셨고 전쟁 중인 월남 땅에서도 예배를 철저히 드리셨습니다. 그 때 성가대를 맡아서 찬양을 지휘하던 분이 연대인지 한양대 피아노과를 다니시다가 군 입대하셔서 월남으로 오게 되셨고 이 분도 월남파병을 마친 후 아버지와 같은 부대인 12사단으로 배치가 됩니다. 어머니께서 이 소식을 듣고 이 분을 모셔와 제게 레슨을 하게 하십니다. 사단 내 군인교회에 비치된 피아노로 혹독하게 피아노를 배웠고 얼마나 무서웠던지 레슨 받을 때 마다 눈물을 뚝뚝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선생님께서 저의 어머니께 “기선이는 음악으로 꼭 뭔가 할 수 있을 겁니다.”라며 장담을 하시더랍니다. 그래서인지 전 남다른 음악능력인 시창능력을 갖게 됐고 학교 들어간 이후 교과서를 받으면 젤 먼저 음악책을 펴고 모든 노래를 악보로 읽어서 다 불러보는 아이가 됐습니다.

중학교 때만 하더라고 좋은 성적을 유지하던 저는 극심한 사춘기에 접어들어 공부에서 손을 떼게 됩니다. 고등학교 때는 중학교 때와 반대의 성적으로 아무도 제가 대학 갈 거라는 생각을 못했죠. 급기야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께서 학교로 소환이 돼 담임 선생님께 충격적인 말씀을 듣습니다. “이 성적으로는 4년제는커녕 지방에 있는 2년제 대학도 가기 힘듭니다. 음악을 시키시면 어떠실지...”
목소리가 좋지 않아 성악은 힘들고, 피아노를 잘 치진 못하니 피아노과도 어렵겠고, 집안이 넉넉한 편은 아니니 다른 악기를 배우기 어려울 것 같으니 작곡을 시켜 보라시던 음악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작곡 입시레슨을 고3 5월에 시작합니다. 입시레슨비가 만만치가 않았는데 마침 저의 아버지께서 대령으로 예편을 하시면서 받게 된 퇴직금으로 아버지를 위한 손수건 한 장 안사시고 모조리 저의 레슨비로 충당이 되었습니다.

이쯤에서 김민기의 노래 하나가 생각납니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너희들은 자랑스런 군인의 아들이다.
좋은 옷 입고프냐 만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어라 군인 아들 너로다.
아 다시 못 올 흘러나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그 청춘을 다 바쳐 군 생활을 마치는 순간을 저의 입시레슨과 맞바꾼 것입니다.
이 노래만 들으면 눈물이 고입니다.
얼마 전 박승화님이 이 곡을 부르는 것을 티비를 통해 봤을 때 가슴이 뭉클했었습니다.



저에게 많은 문화적 유산을 남기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늙은 군인의 노래’ 신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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