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를 인용보도할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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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2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권영철 (대기자)
군.경 80만명 동원해서 6만명 넘게 무차별 검거,
검거자를 A,B,C,D 등급으로 나누고 A등급은 군사재판, B,C 등급은 삼청교육.
B등급은 삼청교육 후 전방에서 강제노역 그 후에도 1~5년 보호감호처분
진상규명도 피해자들의 명예회복도, 국가 배상도 제대로 이뤄지지않음.
전두환은 5공 청문회에서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해 매우 유감"이라며 책임 회피
친절한 대기자, 권영철 대기자 어서 오십시오.
◆ 권영철> 안녕하세요.
◇ 김현정> 오늘 준비해 오신 얘기, 전두환 사망과 관련된 얘기군요.
◆ 권영철> 네, 과거 군사독재 시대에 부린 만행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데 그중에서 삼청교육대와 관련한 얘기를 준비돼 있습니다.
◇ 김현정> 삼청교육대. 기억. 이것을 추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전두환 만행 잔혹사, 이렇게 제목을 붙여오셨네요.
◆ 권영철> 네.
◇ 김현정> 삼청교육대. 젊은 세대 중에서는 좀 낯선 분들도 있을 거예요.
◆ 권영철> 벌써 40년이 지난 일이니까 잘 모르는 분이 있는데 사실 이 시절에는 법이 필요없는 시절이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12조는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만 당시에는 법도 영장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군부 쿠데타 세력, 신군부가 내세운 삼청교육대의 명분은 불량배 소탕작전이었습니다. 당시 전국을 휩쓸고 있던 양은이파, 서방파, 우위파 등 3대 깡패 조직과 일반 깡패들을 제거하여 민심을 얻으려고 하는 정권 차원의 조치라고 했는데요. 전두환 씨가 89년 12월에 있었던 5공 청문회 당시에 밝힌 내용 잠시 들어보시죠.
-삼청교육은 당시 사회 혼란을 틈타 난무하고 있던 고질적인 상습 범죄에 대하여 예방적 차원에서 특별 교육을 통해 교정함으로써 민생 안정을 도모하자는 것이었습니다.
◆ 권영철> 전씨는 삼청교육원각종 사회악을 제거하여 사회 기강을 확립함으로써 국가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려는 시국수습 대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 김현정>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잖아요.
◆ 권영철> 그렇습니다. 삼청교육대에 검거됐던 사람이 6만 명이 넘었습니다. 모두 영장 없이 군이나 경찰에 검거됐고요.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영장 없이 무차별 검거하는 건 모두 불법입니다. 군인들이 하는 일에는 작전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삼청 작전이라고 했고 광주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80년 5월 광주에서는 상무충공작전이라고 이름을 붙였죠. 삼청 작전으로 붙잡은 사람들을 순화교육 시키는 곳이라고 삼청교육대가 됐습니다. 삼청 하니까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국부위가 삼청동에서 있었기 때문에 삼청작전이라고 이름 붙은 겁니다. 삼청 작전에 투입된 군인과 경찰이 80만 명에 이릅니다. 광주 항쟁을 유혈진압 한 뒤에 국민을 대상으로 또 작전을 편 겁니다.
◇ 김현정> 그렇죠.
◆ 권영철> 정인수 전 삼청교육진상규명전국투쟁위원장은 언론 기고문에서 국보위는 5. 18 광주항쟁 때 기겁을 먹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군인을 순치시킬 목적으로 폭력배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경찰과 경문을 앞세웨서 고귀한 인명을 상대로 토끼몰이식 사냥을 얘기를 합니다.
◇ 김현정> 토끼몰이식 사냥을 했다.
◆ 권영철> 그렇게 표현도 하기도 했습니다.
◇ 김현정> 검거한 사람이 엄청 많아요.
◆ 권영철> 네. 영장도 없었고 자신의 혐의를 변호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군 작천처럼 사람들을 검거했으니까 사회 공포 분위기가 조성이 됐었죠.
◇ 김현정> 89년이면 권영철 대기자는 나이가 어떻게 됐었죠.
◆ 권영철> 그때 기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입니다.
◇ 김현정> 진짜로 공포 분위기가 그렇게 심했어요?
◆ 권영철> 그렇죠. 88올림픽이 끝난 뒤에도 사회가 느슨해지는 분위기 89년에, 80년입니다. 80년 고등학교 다닐 때입니다.
◇ 김현정> 그렇죠. 80년대는 고등학생이었겠죠. 삼엄했죠. 그 당시 분위기.
◆ 권영철> 국보위 지침상의 검거 대상은 개선의 정의없이 주민의 지탄을 받는 자. 불건전한 생활 영위자 중 현행범과 재범 우려자, 문란사범, 사회질서. . 입니다. 헌법에 보장된 죄형법정주의는 소용이 없는 그런 폭압의 시절이었습니다.
◇ 김현정> 그렇죠.
◆ 권영철> 이들을 4등, A, B, C, D 네 등급을 분류했거든요.
◇ 김현정> 고기 등급 나누듯이 나눴어요. A, B, C, D.
◆ 권영철> A 등급이 3000명이 넘는데 군사재판. 민간임에도 군사 재판을 받았고요. B, C등급이 삼청교육 대상자였습니다. 순화 삼청교육은 80년 8월부터 81년 2월 1일까지 전후방 26개 부대에서 11차에 걸쳐 실시가 되었고요. 교육기간은 4주간을 원칙으로 하되 죄질 및 개과천선 과정에 따라서 2주간 훈련한 뒤 조기 퇴소하는 게 원칙이었습니다.
◇ 김현정> 억울한 사람이 있었 던 게 문제잖아요. 있었겠지만 영장 없이 검거됐고 민간인이 군사재판을 받아 처벌받았으니까 모두가 억울한 사람이라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 김현정> 고등학생들도 있었지 않아요?
◆ 권영철> 심지어 중학생도 17명 있었다고 국방부 과거사위가 발표한 자료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2만 명 정도가 대상 목표였는데 경찰서, 파출소가 경쟁되면서 경찰을 벌이면서 6만 명이 넘었다 었던 겁니다.
◇ 김현정> 검거된 사례들을, 기막힌 사례들을 볼게요.
◆ 권영철> 민주사력에 의한 변호사 모임에 수집한 피해 사례를 보면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 김현정> 머리길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를 보내요?
◆ 권영철> 자신의 영업 관련 항의를 했다는 이유로 다방에서 손님과 다방 직원 간의 다툼을 말린다고.
◇ 김현정> 다투는 사람도 아니고 다투는 말리는 사람을 데려가요?
◆ 권영철>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을 폭행하는 군인들에게 항의했다는 이유로 이렇게 붙들려가기도 했습니다. 민변에서 수집한 피해 사례 중 보호감호 사례도 있거든요. 고향 친구들과 야구를 하던 중에 경찰에 연행이 돼서 군부대에서 4주간 삼청교육를 받고 1년간 근로봉사 하다가 보호감호 처분을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 김현정> 야구하는 사람을 왜 잡아가요?
◆ 권영철> 이게 뭐 경찰서에서 실적을 올려야 되니까 뭐, 삼청피해자 모임에서 수집한 자료를 보면 능마주의라고 문신을 했다고 부부싸움을 했다고 부부싸움했다고 모임이 밀렸다고 계를 한다고 붙잡혔다고 합니다.
◇ 김현정> 개...
◆ 권영철> 공원에서 포옹을 했다고 잡혀가기도 하고요. 노상에서 실비를 했다고 술주정했다고 불심검문 태도가 좋지 않다고 붙들려간 경우도 있습니다.
◇ 김현정> 야구하다 잡혀간 사람도 있었는데 술주정하다가 잡혀간 사람도 있었겠네요.
◆ 권영철> 피해자 모임의 정인수 위원장이 김대중, 김영상 계의 정치인, 야당인사, 노동운동가, 바른 기사를 써온 기자 등 군부 통치에 걸림돌이 되는 지식인들을 잡아다가 린치를 했다 이렇게 얘기를 했고요.
◇ 김현정> 일단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면 어떤 교육을 받았습니까?
◆ 권영철> 그거를 교육이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군사 훈련 중에서도 가장 센 게 유력훈련이거든요. 유격 훈련보다 더 강도가 높은 가혹행위의 연속이었다고 당시 사람들이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매질은 기본이고 원산폭격, 집단 목봉체조, 거친 땅에서 포복 등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삼청 교육에서 현장에서 숨진 이가 54명,후유증으로 숨진 이가 397명, 정신장애 등 상해자가 2600여 명이었으니까.
◇ 김현정> 정신 이상이 돼 버려요.
◆ 권영철> 네. 제가 근무한 군부대 훈련소가 삼청교육대 중 하나였습니다. 83년에 입대를 했는데 그 지급 받은 훈련복 중에 삼청 숫자가 새겨져 있는 옷이 있고 그랬어요.
◇ 김현정> 그게 무슨 말이에요. 군을 가셨는데 삼청교육대도 거기서 훈련받고 있었다고요?
◆ 권영철> 이미 ... 81년에 끝나기는 했는데... 끝나기는 했는데 그게 삼청교육대였습니다. 당시에 조교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얼마나 심하게 얼차려를 하다가 얼차려를 했는지 탈주하다가 총 맞아 죽은 경우도 있고 맞아서 죽은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 김현정> 여성들도 끌려갔을 거 아니에요. 같은 훈련을 여성들도 받았어요.
◆ 권영철> 공식 자료에 여성은 똑같은 훈련을 받았죠. 319명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어다시 많았다는 주장하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성들도 똑같이 피해으로 당했고요. 문제는 뭐냐 하면 삼청교육을 받은 사람이 주민등록에 삼청교육 이수자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꼬리표가 붙어서 이 사람들이 취업을 할 때도 이사를 할 때도 조사를 받았으니까 얼마나 사회적 불이익을 받았겠습니까? 10년 정도 이상 그렇게 붙어 있었습니다.
◇ 김현정> 삼청교육 받은뒤에 곧바로 귀가를 했어요?
◆ 권영철> C 등급을 받은 사람은 귀가를 했는데 B 등급은 또한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군부대에서 끌려가서 근로봉사, 강제 노역에 시달려야 했고 그게 끝난 다음에 다시 감호 처분을 받아서 감호소에서 1년에 5년까지 감호처분을 받았습니다.
◇ 김현정> 그러니까 이 전두환 씨가 5. 18에 대해서도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이 부분이 우리를 참 화나게 하는 긴다 5. 18 뿐이 아니에요. 이 삼청교육대로 인한 피해자들도 어마어마하게 지금... 많은건데. 이 부분은, 삼청교육대 관련 부분은 사과를 했습니까?
◆ 권영철> 사과도 아니고 유감을 표명한 적이 있는데 역시 오공 때 하던 얘기인데 잠시 한번 들어보시죠.
-당시 사회안정을 시급히 회복시킨다는 목적에서 이러한 계획을 추진하다 보니까 시행과정에서 선의의 피해자가 없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 바. 이 점은 매우 유감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권영철> 국가 폭력을 자행했는데 좋은 일을 하다가 선의의 피해자가 생겼다고 유감이라고 밝힌 게 전부입니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들, 이게 사실은 5월 항쟁이 끝난 직후에 이루어졌잖아요. 그러니까 사회 분위기를 억압하려는 토끼몰이식, 이런 군사작전이었거든요.
◇ 김현정> 진상규명은 되긴 됐어요?
◆ 권영철>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고요. 참여 정부 시절에서 보상법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전체 대상자 중 11%만, 그것도 다치거나 사망한 게 입증된 사람만 받았거든요. 삼청교육을 받은 사람, 정신적으로 후유증을 앓는 사람에 대해서는 보상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민변이 11월에 와서야 지금 22명을 대리해서 소송을 냈거든요. 국가 배상 소송을 냈거든요. 앞으로 더 추가로 모집해서 소송을 할 텐데 이들에 대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당한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 피해 배상이 반드시 이뤄줘야 할 거라고 봅니다.
◇ 김현정> 여기까지 권영철 대기자 수고하셨습니다.
◆ 권영철> 네.
"주요 인터뷰를 실시간 속기로 올려드립니다.
인터뷰를 인용 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을 밝혀주십시오."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11/23(목) [친절한 대기자]"야구하다 끌려간 삼청교육대, 그 아이 어찌 됐을까"
202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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