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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토) 문화평론가 정윤수, "한국야구 화룡정점의 감각, 28년 프로야구의 성과"
2009.09.12
조회 246
■ 방송 : FM 98.1 (07:00~09:00)
■ 진행 : 구성수 앵커
■ 대담 : 문화평론가 정윤수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야구의 사회문화사를 들여다 봅니다. 오늘 도움 말씀 주시기 위해서 스포츠 평론가 정윤수씨 연결돼 있습니다.

◇ 구성수 앵커> 요즘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지 않습니까? 프로야구에 관중이 모이면서 지난 9일자로 아마 역대 최다 관중 기록을 세운 것으로 제가 들었습니다. 하지만 출범 당시에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에 전두환 정권이 국민들의 눈을 정치적 관심사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3S 정책이었다 이런 비판도 있었는데요. 출범 당시 상황을 좀 설명 부탁드릴까요?

◆ 정윤수> 때는 우리 사회가 신군부에 의한 독재 치하였다는 아주 어두운 시절이었다는 점 하나하고요. 사회경제적으로 프로 스포츠를 할 만큼 문화적인 여유라든지 이런 것이 누적되어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 회의적인 것이 있었거든요. 이 두가지를 나눠서 살펴보면 신군부의 강력한 통치 정책이 한 2년 정도 무르익어 가면서 이대로 계속 억누르는 체제로써는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좀 부담스럽겠다는 생각 아래, 특히 학원 자율화도 곧 진행하게 되겠습니다. 1984년에요. 그 2년전에 프로 스포츠를 출범시키므로써 스포츠가 가지고 있는 이른바 3S 정책 효과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섹스, 스포츠, 스크린 이런 문화를 대량으로 공급하면 대중들이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갖기보다는 문화적인 어떤 욕망에 휘감기게 되고, 그 문화적인 욕망에 휘감겨 있다보면 아, 이 나라도 살만하구나 이런 생각을 갖게 된다, 이것이 이제 60년대 나왔던 고전적인 명제입니다만 그런 관점 하에서, 특히 칙사 역할을 많이했던 허문도씨가 이러한 판을 짠 걸로 기록은 남아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런 3S 정책이 궁극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냐 하면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독재자들이 처음에는 뭔가 감정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좋은 방책이라고 실시를 하게 됩니다만 결국은 3S를 통해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 내면에 억눌려 있던 진정한 욕망과 자유 정신을 발견하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결과적으로는 3S 정책을 나중에 철회한다든지 오히려 억압적으로 가게 됩니다. 영화를 검열한다든지 다소 선정적인 표현을 쓴 작가들이 있으면 잡아간다든지요. 결국 3S 정책은 성공할 수 없는 정책이 되는데 축구와 야구가 없었다면 그 시절은 얼마나 더 암울했을까 그 생각을 하면 그것이 정권의 정책적 차원, 정치적 차원에서 실시되었던 점은 분명히 있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서 시민들이 저 나름의 꿈이나 열망, 한순간의 희망, 이런 것들을 느꼈던 것이 프로 스포츠 초창기의 풍경이라고 얘기해야 겠습니다.

◇ 구성수 앵커> 그런데 여러 스포츠 중에서 야구가 채택된 이유가 있나요?

◆ 정윤수> 해석 가능한 부분이 있는데요. 70년대 우리 사회가 탈향 시대였습니다. 50,60년대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고향을 등지고 다들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습니까. 몸은 서울에 있지만 마음은 다 저마다의 고향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고향에 대한 의식,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또은 뿌리를 확인하고 싶은 이것이 두 가지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향우회 활동을 하는 거고요, 또 하나는 고교 야구를 구경하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70년대 고교 야구하면요, 천안북일고라든지 인천의 동상이라든지, 광주일고, 군산상고, 또 부산의 부산상고, 경남고등학교, 경북의 대구상고 이렇게 있지 않았습니까. 경북의 울진이라든지 영양이라든지 대구랑은 직접적인 연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구상고나 경북고등학교를 응원하고 이랬던 모습은 그 고등학교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탈향 의식을 눈앞에서 실현하고 싶은 마음이 70년대 굉장히 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고스란히 자연스럽게 80년대 프로 스포츠로 진화해 나갈 수 있는 토대가 있었죠. 70년대 때의 탈향 의식이 몰입될 수 있었던 고교 야구의 발전, 이것을 자연스럽게 이 성과를 받아안은 80년대 프로야구, 이렇게 해서 80년대 야구 중흥이 일어났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 구성수 앵커> 프로야구가 초반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중에 하나느 광주에 기반을 둔 해태 타이거즈의 선전과 뜨거운 응원을 들 수 있을텐데요. 오히려 스포츠를 통해서 정치적 메시지가 표출된 것은 아니었나 이런 생각도 드는데 어떻습니까?

◆ 정윤수> 틀림없이 80년 광주라는 끔찍한 비극과 민주화 이 두가지 축으로 볼때요. 해태 타이거즈에 대한 호남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은 스포츠에 대한 단순한 호응이라기보다는 억눌린 정치적 감정의 투사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해태 타이거즈와 호남 팬들만의 일이 아니라 경북 지역의 삼성 라이온즈를 열렬히 응원했던 그런 측면도 분명히 있고요. 문제는 건강한 충분히 이해 가능한 정치 의식이냐 아니면 이것이 흔히 비판적으로 얘기할 때 패거리 지역주의냐 할 때 후자라고 보기에는 많이 어려움이 있다는 거죠.

◇ 구성수 앵커> 프로야구 이후 우리나라에도 프로 스포츠가 자리잡기 시작하는데요. 우리나라의 프로 스포츠 도입 과정은 어떻습니까?

◆ 정윤수> 프로 스포츠 도입한다면 형식의 틀을 가져오는 건 일단 82년에 됩니다만 그 내실, 컨텐츠를 채워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뛰어난 감독이나 유학파 선수들의 영입, 이런 것을 들어봐야 될 것 같은데요. 80년도에는 거의 자수성가형 스타일로 일본에서 활동했던 장명부 선수가 들어온다든지 타자이면서 감독이면서 주루 코치까지 다 겸임했던 백인천 감독 같은 분이 들어와서 4할대의 맹타를 휘두르면서 루상에서 작전 지시를 한다든지 획기적인 요즘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요. 그것은 아무래도 그 당시 우리 프로야구가 미성숙의 발전 과정에 있었기 때문일 거 같고요.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팬과 더불어 하는 마케팅의 섬세함, 이것이 프로 스포츠라면 당연히 있어야 하는 부분인데 80년대는 그다지 섬세하진 않았습니다. 그것이 90년대 되면서 프로 스포츠다운 틀, 그리고 감독과 선수의 수준의 상향 평준화, 그리고 팬 마케팅을 전제로 하는 구단의 운영 방침, 이 삼박자가 90년대 이후에 가능하게 되었는데요. 이것은 조금 다른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90년대 이후에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가졌다는 점, 문화를 다양하게 즐기는 것을 누구도 한가로운 소비 행위로 보지 않고, 굉장히 적극적인 개인 생활로 보기 시작했다는 점, 이런 것 때문에 단순히 야구가 있기 때문에 가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한 팬 서비스와 수준 높은 경기력, 이런 게 있으면 가고 없으면 안갔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진정한 의미의 프로 스포츠는 90년대 이후에 만개했다, 그 속에서 박찬호 선수도 탄생하는 것이고요. 그런 역사를 밟아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구성수 앵커> 프로야구 출범이 상당히 정치적인 동기에서 비롯됐다고 아까 말씀하셨는데 지금은 프로야구가 정치색을 많이 탈피한 건가요?

◆ 정윤수> 그럼요. 지금은 프로야구 뿐만 아니라 모든 스포츠 종목에서 정치색, 그러니까 그 경기 하나에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의미의 정치색은 다 탈색됐다고 봐야 될 것 같고요. 오늘의 주제와 관련돼서 말씀드리자면 김응용 감독과 선동열 감독, 해태 타이거즈의 상징같은 인물들이죠. 이분들이 대구 경북을 연고로 하는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과 사장 역할을 맡으면서 인적인 변화 시기가 왔다는 거죠. 이것이 매우 중요하고요. 물론 그럼에도 축구의 인기라든지 야구의 인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든지 약간의 부산물 같은 현상은 있지만 일반적인 시민이나 팬과 프로 특정 구단과의 정치적인 힘의 관계, 이런 것은 거의 다 탈색되었다 이렇게 봐야 될 것 같습니다.

◇ 구성수 앵커> 지난 28년의 프로야구 역사를 돌이켜보면 많은 스타들도 있었고, 쾌거도 많았는데요. 정선생님이 보실 때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은 뭐라고 보십니까?

◆ 정윤수> 저는 최근의 WBC,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 있었잖습니까. 월드 베이스 볼 클래식. 여기서 거둔 한국 선수들의 성취, 이것을 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요. 물론 올림픽에서도 큰 성취를 이뤘습니다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할 때 흔히 그 당시에 나왔던 관전평 중에 대표적인 것이 빅볼과 스몰볼 사이에서 한국 야구의 길을 찾았다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빅볼이란 것은 역시 힘의 야구를 구사하는 미국을 뜻하겠고요. 스몰볼은 아주 과학적이고 데이터의 야구, 섬세한 야구를 하는 일본을 말하는데요. 한국적인 야구의 식스센스, 마지막 결정적인 화룡점정하는 감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 그 원인이 무엇이냐를 살펴보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구성수 앵커> 한국적인 야구의 스타일 하나를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스포츠를 즐기는 수준을 넘어서서 성적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스포츠를 스포츠 자체로 즐겨야 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 정윤수> 그것은 아마 스포츠 외에는 그다지 내세울 게 없고 그다지 자랑스러울 게 없었던 약소국의 한 잔영이라고 봐야 할 것 같고요. 그러나 이제 10년 정도 오면서 경제적인 성장도 성장입니다만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엄청난 쾌거가 있습니다. 꼭 스포츠를 통해서 감정의 과잉된 투사를 안해도 되는 시기로 넘어오게 됐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요즘은 이제 선수 한명 한명이나 경기 하나하나에 민족적 감정을 과잉되게 투사하는 것을 오히려 열렬한 팬들은 말리고 있고 자제하는 편이라고 봅니다.

◇ 구성수 앵커> 프로야구는 관중도 많고 스타들의 몸값도 상당히 높은데요. 반면에 이른바 비인기 종목들을 보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아주 심각하지 않습니까. 이런 부분은 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요?

◆ 정윤수> 그렇습니다. 분명히 빈익빈 부익부가 틀림없이 있습니다. 프로야구와 여타 종목과의 사이에도 있고요, 프로야구 안에서도 존재합니다. 다른 종목과의 형평성을 프로야구가 앞서서 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적어도 같은 종목 안에서 아마추어 야구나 고교 야구, 그리고 프로야구 내에서도 좀 낮은 연봉을 받는 선수들, 이 관계들은 구단이나 KBO가 적절한 형평성, 이것을 항아리 형태로 맞춰나가야 할 것 같고요. 또다른 측면에서는 프로야구만의 문제는 아니겠습니다만 야구가 이렇게 발전해 오는 과정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충분히 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중고교 시절에 장차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서 꿈꾸는 어린 학생 선수들이 수업 들어갈 거 다 들어가고 동시대 아이들과 똑같은 문화적 체험을 다 하면서 성장하는데 우리나라만큼은 교실에도 안들어가고요. 동시대 아이들이 즐기는 문화라든지 복지라든지 이런 것과 멀리 떨어져서 합숙소라든지 집단 훈련이라든지 이런 걸로 십대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것은 KBO 차원에서, 또 한국위원회 차원에서 성장해 가는 아이들에게 학습권과 문화권을 줘야 된다, 이것은 권리다. 이런 전향적인 것이 바로 600만 시대를 앞둔 프로야구의 의무라고 하겠습니다.

◇ 구성수 앵커> 우리 사회에서도 건강한 스포츠 문화가 정착되기를 바래봅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