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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1(토) 성공회대 정해구교수 "또 다른 대통령의 죽음 - 10.26 시해사건"
2009.07.11
조회 256
■ 방송 : FM 98.1 (07:00~09:00)
■ 진행 : 구성수 앵커
■ 대담 : 성공회대 정해구 교수

어제는 노무현 전대통령의 49재였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이었죠. 그런데 1979년에 또 한명의 대통령이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습니다. 10.26 시해 사건의 주인공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그래서 오늘 ‘키워드로 읽은 한국 현대사’ 시간에는 1079년 10월 26일에 일어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사건을 재조명해 봅니다. 10.26의 배경과 원인, 그리고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의 원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성공회대 정해구 교수가 연결돼 있습니다.

◇ 구성수 앵커> 먼저 10.26이 벌어지기 전 당시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시죠.

◆ 정해구> 1979년이었기 때문에 유신 말기의 상황이었습니다. 유신 말기에 독재 정권과 민주화 운동의 대치가 상당히 극단적인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당시에 YH사건이 있었습니다. YH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했던 사건인데 경찰이 과잉진압을 해서 거기서 김경숙 양이 죽은 사건이 발생했던 그런 사건입니다. 그 사건 뒤에 신민당에 대해서 당시 박정희 정부가 집중적인 탄압을 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김영삼 총재를 제명을 하게 됩니다. 제명을 하고 그런 와중에서 10월 달에 부마항쟁,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에서 시민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일종의 항쟁이 발생하고, 거기에 정부에서는 공수부대를 투입시켜서 그것을 진압하는 그런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구성수 앵커> 30년 전의 사건이고요. 당시 저는 고3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당시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 정해구> 실제는 유신체제가 1972년에 등장했습니다만 그 당시 유신체제가 오랫동안 박정희의 장기 집권 때문에 굉장히 민주화 운동과의 갈등이 고조된 상황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탄압이 심해지니까 저항이 심해지고 그게 일차적인 원인이었고요. 그리고 이차적으로 당시 미국에서 카터 대통령이 인권을 강조하는 그런 와중에서 한국 정부에 대해서 압력을 많이 가했습니다. 그런 요인들도 일부 작용했다고 보여 집니다.

◇ 구성수 앵커> 박 전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대통령의 측근이었죠. 그가 이런 행동을 한 이유는 뭘까요?

◆ 정해구>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부마항쟁을 보면서 그것을 민란으로 봤습니다. 아래로부터 박정희 탄압에 대해서 대대적으로 시민들이 직접 참가를 해서 정부의 독재에 저항하는 그런 걸 보면서 계속해서 중앙정보부장이었지만 탄압이 너무 심하게 가는 거 아니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속에서 아마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자신이 박정희를 없애야 한국의 민주화가 되는 거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런 사건을 저질렀던 것 같습니다.

◇ 구성수 앵커> 서거 후 민주화의 진전이 있을 듯 했지만 그 해 겨울 신군부가 집권하고 8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가 우리 정치에 끼친 영향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 정해구> 개인적으로는 불행하게 그런 사건을 당했지만 여하튼 박정희 대통령이 죽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은 민주화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민주화 일정이 어느 정도 진행되기까지 했고요. 그래서 저희들은 그 당시를 ‘서울의 봄’이라고 합니다. 다시 얘기하면 독재라는 겨울이 지나가고 일종의 민주화가 되는 시기라 해서 ‘서울의 봄’이라 했는데 민주화 일정이 진행이 되다가 신군부 세력, 전두환 전 대통령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이 다시 등장을 해서 80년 5월 17일이죠.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고, 일으키는 과정에서 광주 시민들이 여기에 저항을 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극단적인 과잉 진압을 하면서 참혹한 광주 항쟁의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민주화는 유산되게 됩니다.

◇ 구성수 앵커> 역사에 가정을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만약 박정희 정권이 시민의 민주화 운동에 의해서 무너졌다면 신군부의 집권이 가능했다고 보십니까?

◆ 정해구> 저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시민의 민주화 운동에 의해서 붕괴를 했다면 80년대 전반기에 5공화국 단계가 단축되었을 것이라 그렇게 생각합니다.

◇ 구성수 앵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현재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친일 행적이나 독재 정치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경제 발전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정해구 교수님은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정해구> 저도 박정희 시기에 경제가 상당히 진척이 됐다는 건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독재하고 경제 발전 관계를 그렇게 분리시켜서 얘기를 하는데 경제 발전을 위해서 독재가 불가피하다 그런 주장까지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독재가 불가피하다면 만약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현재도 독재가 가능하다는 논리들이 연결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가 같이 결합해서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구성수 앵커> 그러나 지금도 여론 조사를 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선거를 치루면 박대통령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후보가 등장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이어지는 박대통령의 영향력, 어떻게 봐야 될까요?

◆ 정해구> 지금도 여론 조사를 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 아마 여론 지지도가 1위가 나오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는 그때하고 지금하고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는 경제 발전 초창기기 때문에 7,8%, 많으면 10%도 경제 성장이 가능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경제가 발전하면 사실상 고도성장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제가 볼 때는 4,5%도 굉장히 높은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식으로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이지만 현재는 그게 불가능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향수는 있지만 과거 독재를 통해서 된 고도성장의 그것은 현재에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구성수 앵커> 박 전 대통령의 업적 중에 가장 높게 평가받는 경제 발전에 대해서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박전대통령의 강한 카리스마와 리더쉽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까요, 아니면 다른 외적인 요인이 있었을까요?

◆ 정해구> 저는 그것만 경제 발전의 원인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의 카리스마와 리더쉽이 필요했고요. 제가 보기에는 한국의 발전, 경제 발전과 민주화 발전을 가져왔던 커다란 동력은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우리 국민들이 자신은 고생하더라도 자식은 다 교육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교육 수준이 굉장히 높아요. 교육받은 모든 사람이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발전이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국민이 노력을 했고요. 또 그 당시에는 경제 발전 과정에서 미국이라든지 해외 시장이 개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장을 개척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해서 경제 발전을 가져왔기 때문에 단순하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잘했다 이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 구성수 앵커> 당시 독재 정치가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필요악’ 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는 이런 말씀이신 거죠?

◆ 정해구> 네.

◇ 구성수 앵커> 박정희 전 대통령 얘기를 하다보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얘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박근혜 의원의 높은 인기를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육영수 여사의 후광으로 봐도 되는 건가요?

◆ 정해구> 제가 보기에는 그런 요소도 상당히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주로 박근혜 의원의 인기가 높은 지역이 경상도 쪽이고 대구 경북 쪽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이라는 점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요소가 상당히 작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 구성수 앵커> 어제가 노 전 대통령의 49재였는데요. 물론 죽음의 형식이나 의미는 다르겠지만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측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박전대통령의 서거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짧은 우리 현대사에서 두 명의 전,현직 대통령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 어떻게 봐야 될까요?

◆ 정해구> 한국에서 그런 사태가 일어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정치의 후진성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두 대통령의 죽음의 의미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는 쿠데타 이후에 18년 동안 장기 집권을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장기 집권 과정에서 거기에 대한 민주화 운동의 저항이 강화되면서 그런 사건이 발생을 했고요.

노무현 대통령 같은 경우엔 민주화된 시기에 발생했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간접적이지만 일종의 정치 보복적인 요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전부 뒷조사를 하고 그런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에 다시 얘기하면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 독재 과정에서 발생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주의가 역전되는 과정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 구성수 앵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