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홍의 한판승부

표준FM 월-금 18:00-19:30

"인터뷰를 인용 보도할 때는 반드시 프로그램명을 밝혀주십시오."
-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 승부>

12/3(금) 진중권도 국뽕에 차오르는 백제 무령왕릉
2021.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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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를 인용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 'CBS라디오 <한판승부>'를
정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CBS에 있습니다.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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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CBS 라디오 <한판승부> FM 98.1 (18:25~20:00)
■ 진행 : 박재홍 아나운서
■ 패널 : 진중권 작가, 김성회 소장
■ 대담 : 이기환 경향신문 기자


◇ 박재홍> 올해가 한국 고고학사에서 굉장히 의미가 있는 해입니다. 경주에서는 금관총, 금관이 발굴된 지 100년 된 해이고요. 공주에 있는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된 지 또 5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 국립공주박물관에서 특별전시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진중권 작가님이 다녀오셨어요. 그래서 엄청 재미있게 보시고 우리 제작진에게 관련해서 그럼 우리 한판 클라스에서 다뤄보자라고 해서 오늘 특별한 분을 모셨습니다. 경향신문에서 흔적의 역사라는 문화재 관련 연재를 하고 계시는 이기환 기자님 오늘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이기환> 안녕하세요.

◇ 박재홍> 반갑습니다.

◆ 진중권> 안녕하세요.

◆ 김성회> 안녕하세요.

◇ 박재홍> 김성회 소장님과도 인사 나누시죠.

◆ 진중권> 사실은 제가 이기환 기자님의 연재물을 신문 연재물을 유일하게 읽는 게 그겁니다. 거의 다 읽었을 겁니다. 아마 신년 전부터. 그리고 사실 제가 공주까지 가게 된 것도 그 영향이 굉장히 커요. 갔다 온 다음에 또 제가 강력히 추천했습니다.

◆ 이기환> 셀럽의 추천을 받아서.

◇ 박재홍> 저희 PD 중에서도 우리 기자님 기사를 열심히 본 분들이 있어서 한마음으로 모셨습니다. 청취자분도 굉장히 많이 반가워하실 것 같은데 일단 흔적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굉장히 오랜 기간 동안 연재하셨어요. 연재하신 지 거의 10년 되신 거죠?

◆ 이기환> 2011년 8월부터 우연한 기회에 시작을 했는데 10년이 넘었네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10년 넘는 신문연재본이 있을까. 방송을 것 같아요. 그래서 어쨌든 올해 8월에 은퇴는 했는데요. 그래도 아직까지도 쓰라고 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흔적의 역사하고 유튜브 방송을 겸한 이기환의 하이스토리라고 있어요. 그 유튜브도 많이 사랑해 주십시오. 그것도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 박재홍> 유튜브 채널도 광고해 주시고.

◆ 김성회> 제가 채널 광고할 때는 비난하더니.

◆ 진중권> 저런 유해 채널 말고요. 유익한 채널.

◇ 박재홍> 진 작가님도 하나 채널 빨리 하시고요.

◆ 김성회> 준비하고 계시답니다.

◇ 박재홍> 그렇군요.

◆ 진중권> 김성회 소장도 지지자들이 달려와서 노란딱지 달까 봐.

◆ 김성회> 저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 박재홍> 청취자들 중에도 굉장히 우리 기자님 오시니까 연재 잘 보고 있다고. 남용운 님도 말씀해 주시고 락 윤 님도.

◆ 진중권>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됐어요?

◆ 이기환> 사실 신문기자가 하라고 그러면 하잖아요. 그래서 다른 부에 있다가 갑자기.

◇ 박재홍> 정치부에 있다가 경제부 가고 사회부 가고.

◆ 이기환> 그러다가 문화부로 왔는데요. 문화재를 맡으라고 그러더라고요.

◇ 박재홍> 문화재.

◆ 이기환> 그런데 그때 풍락토성 보전 문제와 관련이 있는데 갑자기 제가 뛰어들어가서 맡게 됐는데 굉장히 당황을 했죠. 그래서 문화 기자라는 게 사실은 또 하라면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그다음 날 1면 톱 쓰고 이래야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공부를 안 할 수가 없는데. 처음에는 감흥을 못 느꼈다가 몰매라고 있지 않습니까?

◇ 박재홍> 볼수록 매력 있다.

◆ 이기환> 그렇죠. 그래서 뭔가 하여튼 문화유산을 보면 좀 뭔가 사람의 그 예전의 만들었던 사람들의 뭐랄까. 체취랄까 그 사람의 이력 좀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건 좀 맡아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박재홍> 그래서 10년의 시간이 흘렀고요. 좋습니다. 그래서 기자로서 히스토리텔러의 역할을 하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 이기환> 그렇습니다. 기자가 어떤 폭로를 하거나 무슨 사회 정의를 이렇게 세우는 일도 하지만 때로는 대중적으로 알려주는 의미의 또 기자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히스토리텔러라고 하는 건데 1970년대 여성운동가인데 로빈 모건이 허스토리의 개념을 만들었더라고요. 왜냐하면 히스토리는 남성 중심의 역사다 그러니까 퍼스트의 개념을 만들어서 여성 중심의 역사도 좀 만들어야 되는 거 아니냐 이렇게 했는데 결국은 스토리다라는 의미가 있잖아요. 그래서 유튜브 제목도 하이스토리라고 했는데 그래서 이제 역사를 좀 이야기로 꾸미자. 그런데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열심히 발굴하거나 역사 연구를 한 걸 갖다가 기자는 그걸 소화를 해서 대중들한테 좀 알려줘야 되는 이야기꾼이이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그래서 이제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죠.

◇ 박재홍> 10년간 하셨는데 앞으로도 열심히 하시면서 대중과 소통하시는 건데.

◆ 진중권> 역사 가지고 스토리텔링하는 사람들 유튜브에 넘치잖아요. 짜증나는 건 뭐냐 하면 웬 국뽕들이 이렇게 많아요.

◆ 이기환> 국뽕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좀 있어요. 아무래도 이제 문화재를 사랑하다 보니까 그런 것도 있는데 좀 객관적으로 봐야죠.

◆ 진중권> 그런데 기자님 같은 경우에는 이런 논의들 같은 거 아주 객관적으로 소개를 해 주셔서 정말 유익합니다.

◇ 박재홍> 우리 진중권 작가님이 인정한 히스토리텔러. 우리 이기환 기자님과 말씀 나눠볼게요. 일단은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기념해서 모셨는데 무령왕릉 하면 우리 진 작가님, 김 소장님은 뭐가 떠오르시는지. 우리 진 작가님부터 해 보실까요?

◆ 진중권> 저는 전축분? 그게 중국 어디 양나라.

◆ 이기환> 양나라.

◇ 박재홍> 양나라죠. 읽은 티가 나죠.

◆ 이기환> 벽돌 무덤입니다.

◆ 진중권> 그런데 너무 정교하고 너무 예뻐가지고 그리고 또 이번에는 전시물 중에서 정말 목관 있잖아요. 그걸 딱 보는 순간에 감동이었습니다.

◆ 이기환> 재현을 해서 전시를 했습니다.

◇ 박재홍> 우리 김 소장님은?

◆ 김성회> 그 안에서 금으로 된 것들이 많이 발견이 됐던. 그걸 예전에 봤던 기억들이 나는데 어떻게 그렇게 그 시대에 제 유치한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정교하게들 만들어서 놔둘 수 있었는지 그것이 훼손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는지 이런 게 참 저는 좀 신기했습니다.

◆ 이기환> 그렇죠. 조금 이따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박재홍> 이제 무령왕릉 발굴스토리가 굉장히 유명하잖아요. 1971년 7월 5일이었는데 그게 우연하게 발견된 거였죠? 기자님?

◆ 이기환> 그렇습니다. 이게 사실은 삼국시대 고분 가운데 주인공을 유일하게 알 수 있는 무덤이기도 하고.

◇ 박재홍> 이게 누구의 무덤이라라는 걸 알 수 있죠.

◆ 이기환> 내가 무령왕이요 하고 선언하고 나온 무덤이기 때문에 1971년 7월 초인데 뭔가 여름철만 되면 이제 비가 새고 습기가 찼던 고분이 6호분이었어요. 바로 앞에 있는데. 그것도 역시 전돌분이고 그다음에 벽화가 있었던 무령왕릉와 거의 비슷한 무덤인데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무덤인데 그게 자꾸 습기가 그걸 보호하려고 6호분 뒷부분에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인부의 삽날에 무덤 벽을 쌓았던 말씀하셨던 전돌이 캉 하고 부딪힌 거예요. 그래서 아, 이거는 뭔가 뭐다 그래서 보고를 했더니 1442년 만에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 거기서 현연을 했다라고 할 수 있죠.

◇ 박재홍> 그런데 이제 일제강점기 때 굉장히 도굴을 많이 당해서 문화재 보존이 안 된 상황도 많았을 텐데 무령왕릉은 도굴 피해가 없었던 거군요.

◆ 이기환> 이게 참 극적인 순간이 하나 있었는데요. 큰일날 뻔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공주 일대에 고분을 이렇게 막 닥치는 대로 조사하는데 도굴, 무단 발굴했던 일본인이 있었어요. 누구냐면 공주 고보 교사였던 가루베 지온입니다. 그러니까 전공자도 아닙니다, 일본어 교사인데. 이 자가 무령왕릉 바로 앞에 있던 송산 6호분 그 고분을 무단으로 막 발굴했습니다. 1931년부터 33년 사이에. 그래서 그 가루베가 거기서 발굴했는지 도굴했는지 몰라도 거기에서 출토된 공주 출토된 유물을 갖다가 일본에 모교에 기증도 하고 그랬던 이력이 있기 때문에 도굴이나 다름없었는데 이제 1933년 정도 무렵인데 가루베가 6호분 뒤에 뭔가 고분의 봉분 같은 둔덕 같은 게 보였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때 가루베가 착각을 하는 게 뭐냐 하면 자기가 무단 도굴한 6호분을 무령왕릉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 뒤에 있는 봉분 같은 거 이거를 6호분을 수호하기 위한 이른바 현무릉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잘 알잖아요. 사신사라고 해서 좌청룡, 우백호 뭐 이런 북현무, 남주작 이런 거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6호분을 보호하기 위해서 북쪽에 조성한 현무릉이라고 한 거죠. 그래서 발굴을 안 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몽골이 송연해지는데 만약에 가루베가 이 무령왕릉 존재를 확인하고 무령왕릉까지도 무단발굴, 도굴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렇죠? 끔찍한 일이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무령왕 부부의 합작릉이 이렇게 도굴을 어떻게 보면 선무당의 눈길을 가까스로 피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진중권> 그래서 그 자가 선무당이었던 게 어떻게 보면 다행이네요.

◆ 이기환> 다행이죠.

◆ 진중권> 그런데 이제 사실은 우리도 이 발굴을 또 제대로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난리가 났었다고.

◆ 이기환> 그럼요.

◆ 진중권> 발굴현장에 기자들이 또 들어가서 밟기도 하고 이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거든요.

◆ 이기환> 기레기라고 했을 거예요.

◇ 박재홍> 이 당시로 치면.

◆ 이기환> 그런데 사실은 그 이전에는 사실은 우리 손으로 경험해 본 발굴다운 발굴이 방송었습니다.

◇ 박재홍> 그렇군요.

◆ 이기환> 해방 이후에 1946년에 호우청 발굴이라고 했는데 그때는 그냥 시험발굴이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이 광개토대왕 명문이 새겨진 청동그릇이 나와서 굉장히 유명한 발굴이긴 하지만 발굴 자체는 소규모였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이후에 발굴다운 발굴이 없다가 우연한 기회에 도굴이 안 된 생생한 고분을 발견했으니까 엄청난 거죠. 그때 예전에는 이 고분을 도굴 안 된 고분을 처녀분이라고 했었는데 요즘은 큰일 나는 그런 제목이죠. 10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이제 표현을 했었는데 조금 합리적인 그런 용어를 찾아야 될 것 같아요. 용어가 없습니다.

◇ 박재홍> 그렇군요.

◆ 이기환> 어쨌든 발굴에 참여했던 모든 연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거는 도굴이나 다름없는 발굴이었다, 졸속이었다라고 자아비판하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뚝딱 해치운 발굴이었기 때문이죠.

◇ 박재홍> 당시 사진을 제작진이 준비했는데 저 지금 사진을 보시면 뭐랄까요. 굉장히 지금 소풍 가서 뭐 채굴하는 듯한 그런 사진 모습이 또 있고요. 굉장히 지금 통제가 안 된 상태에서 기자들 와서 또 사진 찍고 있고.

◆ 이기환> 그렇습니다. 이게 1975년 7월 5일에 발견을 해서 긴급조사단이 현장에 급파돼서 7일 오후부터 발굴이 시작됐는데 이 사실을 눈치챈 기자가 하나 딱 있었습니다. 한국일보 기자였는데 이 문화재관리국 가보니까 서울에 있는데 아무도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어디 갔냐 그랬더니 공주로 내려갔다고 그래서 무작정 공주로 갔대요. 그래서 이제 취재를 해서 8일자로 특종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난리가 난 거죠. 물 먹은 기자들 있잖아요. 저 같이. 물 먹은 기자들이 전국에서 몰려들고 이제 막중한 기자가 이 문화재 관리국 과장의 뺨을 때렸다, 이런 게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 박재홍> 알려지지 않고 한국일보만 취재하게 했다.

◆ 이기환> 그렇죠. 왜 나한테는 알려주지 않았냐. 그런데 지금 같으면 정말 옷 벗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박재홍>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만큼 취재가, 과열 취재가 있었다라고 볼 수 있었네요.

◆ 이기환>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제대로 된 발굴 경험도 없었던 조사단 그리고 역시나 발굴에 취재 경험이 없었던 기자들이 이제 어울려져서 현장이 아수라장이 됐는데 기자들이 사진 좀 찍자고 난리를 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제 조사단장이 김원용 선생인데 아주 기가 막힌 결정을 해 버립니다. 기자 1명씩 가서 한 커트씩 찍고 나와라,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그게 됩니까? 기자들이? 안 되죠. 말이 안 되는 얘기죠.

◇ 박재홍> 1장씩만 찍고 오라고 했다.

◆ 이기환> 그거는 정말 터무니없는 명령이었을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기자들이 아수라장되고 그러니까 청동숫가락 하나가 뭐 부러지기도 하고 그랬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난리가 나니까 조사단에서 긴급회의를 열어요. 그래서 천추에 한이 남을 결정을 내리는데 그게 뭐냐 하면 안 되겠다, 빨리 유물을 수습해야 되겠다 해서 8일 밤 10시부터 9일 아침 9시까지 11시간 동안 무덤 바닥에 놓인 좀 큰 유물 이런 건 대충 수거하고 그다음에 남은 거 잔뿌리 엉킨 이런 자잘한 유물들은 정말 그야말로 삽과 빗자루로 해서 쓸고 담아서 그래서 쌀포대 2자루에 넣었다. 서둘러 싣고 나갔다 이런 기록이 있는 거죠.

◆ 진중권> 그때 경찰을 불러서 현장 통제를 좀 하고 그랬어야 했는데.

◇ 박재홍> 펜스를 치고 이렇게 했어야 됐던 건데.

◆ 이기환> 경험이 없으니까.

◇ 박재홍> 경험이 없으니까.

◆ 김성회> 그 당시 공주 경찰이 나왔을 때 서울에서 기자가 완장 차고 들어가서 뭐 하는 거냐고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거냐 이랬으면 경찰이 어떻게 하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 박재홍> 그러니까.

◆ 진중권> 한국 고고학의 흑역사가 돼버린 거네요.

◇ 박재홍> 흑역사예요.

◆ 이기환> 그래서 2년 뒤에 천마총 발굴 때는 딱 정리가 이렇게 됐었는데 그때만 해도 그렇게 안 됐어요. 그래서 김원용 조사 단장이 나중에 이런 말을 했죠. 기자들이 난리를 치더라도 양해를 구하든 쫓아내든 해서 현장을 보존하고 차근차근 조사를 해야 했는데 조사단장인 당신이 먼저 흥분을 해서 졸속 발굴을 결정했다, 이거는 정말 다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라고 반성을 했는데 그래서 도굴이나 다름 없었던 졸속 발굴, 무령왕릉 발굴이 해방 이후의 최대 발굴이면서 한국 고고학사의 흑역사, 이런 식으로 이제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 박재홍> 당장에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출토 유물 중에 팔찌를 끼워봤자 이런 소리가 있던데 그건 사실입니까?

◆ 이기환> 그게 또 역사적인 발굴이니까 이게 또 숱한 해프닝, 여담이 있어요.

◆ 진중권> 개념이 없었던 거지.

◆ 이기환> 모든 게 개념이 없었던 거예요, 모든 분들이. 그러니까 유물을 서울로 옮겨가려고 하니까 지역 주민들이 또 집단 농성을 벌이고 가져가면 안 된다 이랬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제 김원용 관장이 가장 낡은 청동제 신발을 가져와서 봐라, 이 청동신발이 중병에 걸렸는데 서울에서 고치지 않으면 썩어문드러진다 이렇게 설득을 하고 겨우 서울로 옮겨졌는데 무령왕릉 출토품 가운데 주요 금제 유물들을 당시 박정희 대통령한테 보여주죠. 박 대통령이 야, 이게 진짜 순금이야 하면서 막 이렇게 휘어보기도 하고 이랬다 그래서 옆의 김원용 단장이 진짜 가슴을 졸이고 조마조마했다라는 흑역사가 있습니다.

◆ 김성회> 보통 이렇게 물어보지 않습니까?

◇ 박재홍> 물어보고 깨물어보는데 그런 건 없고 휘어보는.

◆ 진중권> 올림픽 메달이냐.

◆ 이기환> 그게 이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모든 분야의 모든 사람들이 경험이 없었던 거예요. 대통령서부터 해서.

◇ 박재홍> 기자님 알아보시는 청취자들 굉장히 많습니다. 지금 JYB멘트님은 재미있어서 바로 구독 신청을 하고 아들에게도 역사 채널을 공유했다 이러는데. 그래서 이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유물을 총출동해서 지금 이제 전시회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규모가 굉장히 크네요.

◆ 이기환> 그렇습니다. 발굴된 유물이 5232점이라고 하는데 모두 나왔다고 하고요. 그중에 국보로 지정된 12건, 17점도 다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진중권 작가님께서 다 보셨을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내년 3월 6일까지 하니까 많이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반드시 한번쯤 가보셔서 무령왕릉 부부의 만나고 오시기 바라고요. 워낙 국보급 유물도 많고. 그러니까 이것도 보고 싶고 느끼는 대로 가서 보시면 돼요. 공부하고 이러는 것보다도.

◇ 박재홍> 박물관 가면 그냥 이게 또 피곤해서 빨리빨리 가서 이렇게 한 0. 1초씩 보잖아요.

◆ 진중권> 동창들하고 가지 마세요. 제대로 못 봅니다.

◆ 이기환> 그게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 박재홍> 혼자 가야 됩니까?

◆ 진중권> 혼자 가야 되는데.

◆ 김성회> 요즘 많은 경우에는 스마트폰을 통해서 설명을 들을 수 있도록 되어 있죠? 그렇게 들으면 훨씬 재미있긴 하던데요. 설명을 알고 들으면 괜찮은 것 같은데요.

◆ 이기환> 그러니까 설명을 알고 들으면 괜찮은 것 같은데요. 제일 중요한 건 느끼는 대로 보는 게 제일 중요할 것 같고요. 저는 이제 그래서 국보 이야기 아까 얘기했던 졸속 발굴 이야기들은 너무 많이 얘기한 것이기 때문에 뭔가 이번에는 좀 색다른 그런 아이템이 없을까 하다가 무령왕 부부의 장례식을 좀 이렇게 제가 꽂혀서 들고 와봤습니다.

◇ 박재홍> 그렇군요.

◆ 진중권> 거기 관이 목관이 2개가 전시가 돼 있는데 완전히 새거고 하나는 조금 낡은 듯한데 이 2개가 다 모형입니까?

◆ 이기환> 아니요. 이번에 제대로 재현을 해서 복원해서 갖다 놓은 건데 이렇게 마구리 장식이 있는 것은 이제 왕이고 옆에 있는 건 왕비 겁니다.

◆ 진중권> 그럼 그게 남아 있는 유물인 건 맞는 거네요.

◆ 이기환> 남아 있는 유물을 가져온 거예요.

◆ 진중권> 그다음에 옆에는 진짜 새걸로 재현을 해 놨더라고요.

◆ 이기환> 그건 재현해 놓은 거고.

◇ 박재홍> 지금 박물관이 갔다온 사람과 안 갔다온 사람의 차이가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 진중권> 왜냐하면 그 느낌이 뭐였냐 하면 이제 저희가 처가가 일본에 있잖아요. 그런데 일본 문화의 원료가 미감이라든지 약간 디자인 이런,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상당히 백제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굉장히 들었거든요.

◆ 이기환> 그 관이 금송인데 금송이 일본제라고 하죠. 일본에서 수입한 당시에 그랬다라고 하기 때문에 교류가 많았다라고 볼 수 있는 거죠.

◇ 박재홍> 그래요. 그래서 우리 기자님께서 주목하신 부분 연꽃 모양 장식이 가장 눈에 띄셨다 말씀해 주셨어요.

◆ 이기환> 그렇습니다. 저는 그래서 좀 색다른 게 없을까 하다가 왕비와 왕 무덤에 넣었던 수많은 연꽃모의 장식이 눈에 띄었는데 금과 은으로 만든 연꽃장식의 수가 805점이었어요, 805점이었는데. 그중에 금재가 668점이고 은재가 137점이었는데 놀라운 것은 이 금재 연꽃장식의 금 순도, 금 함유량이 93%에서 99. 5%였습니다. 그러니까 완전 24K죠. 완전 순금이죠. 그리고 순금 연꽃장식을 700개 가까이 이렇게 제작을 했다라는 얘기이고 은재가 137점인데 관의 마구리 장식 보셨던 그거는 굉장히 99. 9%라고 해요.

◇ 박재홍> 화면으로 나가고 있어요. 굉장히...

◆ 이기환> 화려하죠.

◇ 박재홍> 예쁘네요.

◆ 진중권> 그러니까 저거를 어떻게 박혀 있는 겁니까? 아니면 그냥 뿌려놓은 겁니까?

◆ 이기환> 뿌려놓은 걸 수도 있고 조금 이따가 설명을 해 드릴 텐데요. 그런 금은 장식, 연꽃 장식 외에도 금은동으로 만든 원형장식이 또 있어요. 저런 거 말고 또 있는데요. 원형장식 또한 1910점이나 무덤에서 찾아낸 거죠.

◇ 박재홍> 굉장히 많네요.

◆ 진중권> 다 사진 찍어왔습니다.

◇ 박재홍> 우리 진 작가님도 가서 찍어오셨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이 장식 말고도 벽, 천장, 무덤 안에도 이 연꽃무늬가 굉장히 많다고 하는데 그럼 이게 불교 당시 문화였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 이기환> 그렇습니다. 이게 장식 중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으니까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은 아마 왕이나 왕비의 옷이나 이런 데 꿰매서 달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베개나 발받침 장식을 했을 거고 그거 다 합치면 2715점인데 모든 게 다 옷장식하는 데 쓰지는 않았을 거고요. 구멍이 없는 것도 있거든요. 무덤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것도 있고 그래서 뭔가 연꽃 원형장식이것이 무령왕과 왕비의 장례의식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예상을 하는데요.

◆ 진중권> 낭만적이다. 흩뿌려놓는 거.

◆ 이기환> 그래서 연꽃장식을 붙이거나 꿰맨 휘장 같은 거 달아놓거나 아니면 벽에 걸어놨거나, 휘장을. 그리고 목관을 이렇게 덮었거나 연꽃을 갈았거나 이런 거고 실제로 목관과 벽면에 보면 뭔가를 걸었던 그런 못의 흔적들이 있거든요. 거기에 걸었을 것이다라고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거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전돌로 쌓은 무령왕릉의 벽과 천장 보셨다고 했지만 무수한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거든요. 그걸 제가 전돌에 새겨진 연꽃문양을 세어보다가 1000개쯤 세어보다가 지쳐서...

◇ 박재홍> 천백스물 뭐 이렇게 하다가 갑자기 지쳤군요.

◆ 이기환> 갑자기 헷갈려서 제가 포기했습니다.

◇ 박재홍> 연꽃무늬가 새겨진 장식. 은잔도 저희가 실시간으로 사진으로 보여드릴게요.

◆ 진중권> 저기 중간에 홈이 있지 않습니까? 저기다가 옛날에 등잔이 들어가 있었던 건가요?

◆ 이기환> 실제로 등잔이 걸려 있었고 거기에 피웠던 흔적이 남아 있죠.

◇ 박재홍> 재가 남아 있어요?

◆ 이기환> 그을음 같은 그런 게 남아 있어요. 그러니까 피워놓고 아마 나갔겠죠. 장례식 끝나고. 그러면 그것이 이제 자연스럽게 꺼졌겠죠. 그런 식으로 했을 겁니다. 저게 벽면에 한 1만 개 정도 연꽃문양이 그랬을 것 같아요. 1만 개는 넘을 것 같고 수만 개 정도 될 것 같은데요. 관장식에도 있고 또 베개나 발받침에도 있고 청동잔하고 동탁 은잔에도 있고. 그래서 무덤 안이 어떻게 보면 연꽃 세상이었다라고 우리가 이제 얘기할 수가 있는 거죠.

◇ 박재홍> 재미있네요. 지금도 관련해서 연꽃무늬가 새겨진 장식들 은잔. 유튜브로 저희가 보여드리고 있는데요. 말 그대로 정말 너무 멋있다, 멋지다라는 생각 들고 또 뭐랄까요. 저런 유물이 있으니까 우리 문화가 좀 자랑스럽다, 이런 생각도 드는데 저렇게 좀 멋지고 금 아까 순도가 거의 95% 뭐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 이기환> 90% 이상, 99%까지 있죠.

◇ 박재홍> 당시 백제가 문명사적으로도 그런 기술이 발달했구나 추정할 수도 있겠네요.

◆ 이기환> 그럼요. 그렇습니다.

◇ 박재홍> 그래요. 그러면 이제 왜 연꽃일까 아까 살짝 말씀드렸는데 불교를 상징하는 거 맞습니까?

◆ 이기환> 그렇습니다. 연꽃이 인도가 원산지라고 하는데 불교와 인연이 깊은 꽃이라고 하고 부처님의 탄생을 뭐 이렇게 알린 것도 연꽃이었다고 하고 또 극락세계에서는 모든 신자가 연꽃 위에서 신으로 태어난다, 이렇게 믿어지고 있고요. 그래서 연꽃이 속세의 더러움 속에서 피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 이런 것을 상징하는 극락세계를 상징한다, 이렇게 얘기하고 그래서 무령왕릉은 서거한 무령왕 부부가 괴로움이 없고 뭐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의 극락세계에서 살기를 기원하면서 조성한 연꽃무덤이었다라고 우리가 규정할 수가 있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 박재홍> 불교에 관한 역사적 이야기이니까요. 그리고 또 기자님께서 관심 있게 보신 유물이 또 있었다고. 신체 관련 유물.

◆ 이기환> 그러니까 이게 또 부연설명을 하자면 장례가 끝나서 그렇게 이제 휘장에다가 옷에다가 목관에다가 연꽃을 달았을 거 아니에요. 그것이 이제 닫고 나오면 시간이 지날 거 아닙니까? 그러면 썩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어느 순간에 그런 연꽃장식이나 이런 장식들이 후두둑 떨어졌을 거 아니에요. 그럼 결국 그 무덤 안이 어느 순간에는 연꽃비가 내렸다 우리가 이렇게 스토리텔링을 할 수가 있다라는 얘기죠. 굉장히 좀 뭔가 장엄하고 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2715개인데 아까 얘기했던 연꽃이나 원형장식이. 그런 게 다 후두둑 떨어져가는 그런 모습을 상상해 보면 얼마나 이렇게 좀 느낌 있는지 우리가 한번 상상을 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 박재홍> 저희가 영화 속에 이집트, 미라 이야기하지만 우리나라도 큰 역사를 담고 스토리를 담고 있는 그런 고분들이 굉장히 많았다 생각할 수 있겠네요.

◆ 이기환> 그렇습니다.

◆ 진중권> 이게 원래는 무령왕릉께서 먼저 돌아가시고 왕비가 나중에 해서 3년 뒤에 합장을 한 거죠.

◆ 이기환>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신 다음에 그냥 묻는 게 아니라 빈이라고 그래서 장례를 한 3년 동안 하고 역시 28개월인가 그런데요. 역시 왕비도 그렇게 해서 523년에 돌아가신 무령왕은 225년에 이제 장례를 하고 완전히. 그다음에 526년에 돌아가신 왕비는 529년에 완전히 합장을 한 상황이죠.

◇ 박재홍> 그리고 또 재미있는 사진이 하나 더 준비가 돼 있는데 무령왕비 치아 사진이 있어요.

◆ 이기환> 이게 참.

◇ 박재홍> 유튜브로 지금 보여드리고 있는데. 이것도 물론 발굴하면서 발견했던 거죠?

◆ 이기환> 그렇죠. 이게 도록에 나온 사진을 보면 제가 도록에 나온 사진을 봤는데요. 꽤 크게 나왔죠, 사진이. 막상 실제로 가보시면 1cm도 될까 그래서 너무 작아요. 그런데 이 유물이 뭐냐 하면 나중에 유물 수습할 때 왜 빗자루 해서 삽으로 퍼잖아요.

◆ 진중권> 그러니까요. 거기서 나온 거예요.

◆ 이기환> 거기서 나온 거거든요. 기적적으로 발견된 건데 이게 여인의 어금니나 혹은 사랑니로 추정되기 때문에 역시 두 분 중에 한 분일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제 무령왕비의 어떤 치아다라고 하는데 DNA 분석에는 실패를 했고 저게 겉만 이렇게 형태가 남아 있지 살짝만 이렇게 대도 이렇게 뭉그러지는 그런 상황이어서 굉장히 어렵다고 합니다.

◇ 박재홍> 이게 1000년 이상 있었던 존재로 보기 때문에.

◆ 진중권> 친구들이랑 같이 갔는데 애들이 다 못 봤어요. 그래서 제가 다 끌고 가서 여기 있다, 이걸 봐야 한다. 이만하거든요. 보이지도 않거든요.

◇ 박재홍> 현장 교사 역할 충실히 또 해 주셨습니다. 경향신문 이기환 기자와 함께 문화재 라디오 관람을 하고 있고요. 잠시 후 백제시대에 대한 이야기도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 박재홍> 한판승부 한판클라스 경향신문 이기환 기자님과 함께 역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백제 이야기를 좀 해 볼 텐데 오늘 이제 무령왕릉에 출토된 유물들 좀 봤고요. 출토 유물에 대한 비화를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일단은 무령왕릉의 주인 무령왕 어떤 인물인지 일단 백제에 대해서도 저희가 역사책으로 공부도 하고 시험도 보기 때문에 많이 공부를 했지만 다 잊기 쉽기 때문에 기자님께서 핵심적으로 기억할 만한 포인트 좀 말씀해 주시면.

◆ 이기환> 무령왕이 이제 40살에 비교적 늦은 나이에 직위를 했습니다. 501년에 즉위를 했는데 여러 가지 설이 있어요.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얘기한 거고 그다음에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의 아들이다. 혹은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이다라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요. 그건 잘 모르겠고, 일단은. 그 당시에 백제가 풍전등화에 놓여 있었죠.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으로 해서 개로왕이 죽고 옹진으로 천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도 그렇고 상군왕도 그렇고 각각 3년 만에 피살을 당하거나 혹은 일찍 돌아가십니다. 그래서 동성왕이 나중에 즉위를 하는데 역시나 귀족세력인 백가한테 살해가 되죠. 그 후에 무령왕이 국력이 한없이 쇠잔된 상황에서 귀족 간의 세력 다툼이 심한 상황에서 왕위에 올랐던 때죠.

◇ 박재홍> 그래요. 혼란 시기에 왕이 돼서 난제를 해결했던 왕이다, 이렇게 보면 되겠습니까?

◆ 이기환> 그렇습니다.

◇ 박재홍> 그렇군요.

◆ 진중권> 누파구려 갱위강국. 무슨 뜻입니까?

◆ 이기환> 고구려를 여러 차례 깨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는 걸 선언했다라는 의미죠.

◇ 박재홍> 누파구려 갱위강국.

◆ 이기환> 누파구려 갱위강국. 그러니까 그거는 뭐냐 하면 예전에는 강국이었다라는 얘기잖아요. 그랬다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는 얘기이기 때문에 의미가 좀 큰 건데요. 무령왕이 눈앞의 난제를 하나하나 풀어갔는데 창고를 열어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휼했다. 그다음에 제방 등에서 수리 시설을 확대했다. 농사를 장려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한 다음에 세력을 밖으로 떨쳐서 섬진강, 낙동강을 경유했다 이런 얘기도 있고. 특히나 이제 숙적인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즉위한 지 20년 만에 중국 양나라에 보내서, 사신을 보내서 우리가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리고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게 바로 누파구려 갱위강국입니다. 그러니까 멸망 일보직전에 즉위를 해서 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았고요. 그래서 누파구려 갱위강국을 선언한 지 2년 만에 돌아가세요. 그리고 부인은 아까 얘기했지만 3년 뒤에 526년에 돌아가시고 3년 뒤에 부부 합작묘를.

◇ 박재홍> 갱위강국했으니까 급이 많았군요. 그래서 저희가 고구려 신라 역사는 많이 아는데 백제 역사는 또 은근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백제 리즈 시절이라고 표현해야 될까요. 설명을 더해 주시면?

◆ 이기환> 왜냐하면 백제를 한성기 백제하고 웅진백제하고 사비백제로 나누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맨날 웅진백제나 서비백제를 많이 얘기하지 한성백제는 얘기는 별로 안 했거든요.

◇ 박재홍> 수도가 한성인 백제.

◆ 진중권> 풍납토성.

◆ 이기환> 거기를 얘기하는 건데 예전에는 광주라고 했죠. 거기였는데 백제가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660년까지 678년을 존속을 했는데 최전성기는 역시나 도읍지가 한성이었던 475년까지 493년입니다. 굉장히 길죠. 웅진이나 사비는 어떻게 보면 정치, 외교적으로 뭔가 아주 어려운 시기에 중흥을 꾀하다가 결국 무령왕릉 즈음에 반짝했다가 다시 쇠잔해서 멸망해 가는. 물론 문화적으로는 아주 번성을 하고 그랬지만 정치, 외교적으로는 좀 그런 면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한성백제 이야기를 좀 뭔가 소홀히 여기는 그런 측면이 있죠.

◇ 박재홍> 그래요. 그러니까 백제가 본성에서 중국 대륙까지 진출했다 이런 이야기도 있는데 역사적 근거로 어느 정도까지 지금 확인된 사실인가요?

◆ 이기환> 이것이 대개 짚고 넘어가야 될 부분이에요. 한국 고대사에 굉장히 큰 미스터리라고 하는 게 말하자면 이제 요서경략기사인데요. 백제가 한때 중국 요서 지방을 비롯한 중국 대륙 일부를 점령해서 지배했다라는 견해인데 중국 사서에 많이 나오거든요. 600년 이상의 중국 사서에 계속 나옵니다. 그러니까 정확한 사실이 아니냐라고 기록이 돼 있는데 18, 19세기부터 조선시대 때부터 논쟁이 벌어지죠.

◇ 박재홍> 그래요.

◆ 진중권> 아무래도 조선시대 때는 사대주의가 있기 때문에.

◆ 이기환> 그런데 원래는 이게 요서경략이 488년에 편찬된 중국지 역사서인데요. 송소에 처음 소개가 됩니다. 뭐라고 그러냐 하면 백제국은 고구려와 더불어서 요동의 동쪽 천 리 밖에 있었다. 그 후에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해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균 진편현이라고 한다라고 얘기를 하고 송소뿐이 아니라 조금 뒤에 이렇게 어떤 각국 사절들 그림으로 그려서 해설한 양직공도라는 그런 문헌 자료가 나옵니다. 거기는 진나라 말에 고구려가 요동 낭랑을 차지하고 백제는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계속 이렇게 확대 재생산이 되는 그런 상황으로 중국 사서에 나오는데 이게 또 아니라는 반론이 있는 건 뭐냐 하면 이제 삼국사기에 안 나옵니다. 결정적인 흠이라고 볼 수가 있고 그다음에 백제가 경략했다는 요서 지방에서 백제인의 영역임을 입증할 고고학 자료가 아직 안 보인다. 중국이니까 아직 못 찾았을 수도 있지 않느냐라고 하고 그리고 삼국사기 때 안 나온 게 여러 가지가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지금 안시성주, 안시성주가 누구죠?

◆ 진중권> 앙만춘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 박재홍> 안시성 사건.

◆ 이기환> 그것도 사실은 삼국사기에 없어요. 삼국사기 보장왕조에 뭐라고 나와냐면 우리가 안시성주가 너무나 큰 활약을 했는데 그 이름을 모르니까 애석하구나 이런 얘기가 나오는데요. 그것이 나중에 조선시대 때, 조선시대 때 그게 현종 때인가 효종 때인데 그때 이제 중국을 갔다 온 그런 사신. 우리나라 사신이 중국 사람한테 듣고 와서 한 이야기가 이제 아 안시성주는 양만춘이었다라고 거기서 비로소 나오거든요. 그 이후에 이제 안시성주가 양만춘이었다는 게 역사적 사실로 얘기를 하는 거지 삼국사기에는 없어요.

◇ 박재홍> 역시 역사는 이에치카가 말한 대로 역사의 관점이 들어가서 서술이 되는 것 같습니다. 백제 문화 얘기를 좀 얘기를 해 보면 문화가 굉장히 대단했다라고 하고 실제로 이제 저희가 유물 출토된 걸로 많이 확인이 되는데 금동대향로. 많은 분들이 사진을 보시면 아실 것 같아요. 유튜브 보신 분 사진 볼 수 있도록 한번 띄워드리면 금동대향로. 이 유물 딱 보기만 해도 뭔가 이게 1500년 전에, 1700년 전에 이런 게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 대단한데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설명을 더 해 주시면.

◆ 이기환> 이게 1983년에 출토가 됐는데 우연히도 사지, 그러니까 능산리 사지라는 곳을 발굴하다가 물구덩이 같은 데인데 공방에 보니까 마을 굴처럼 뭔가 물통 같은 데서 발견이 된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뭐냐 하면 이제 백제가 멸망하리라는 걸 꿈에도 생각 못한 스님들이 막 쳐들어오니까, 신라가 쳐들어오니까 거기에다가 일단 중요한 거니까 두고서 조금만 일주일만 갔다 오면 되겠지 하고 갔다가 영영 못 찾은. 그게 폭삭 무너져서 1400년 이상 무너진 다음에 발견이 된 건데요. 그래서 이제 93년에 출토가 됐는데 이게 딱 출토가 된 그 순간부터 제작 논쟁이 벌어졌어요. 이건 이렇게 잘 만들 수가 없어, 백제가. 이건 중국 거야라고 해서. 중국 한나라 시대에 성행했던 박산향로가아니냐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성황이 사비 천도하고 이런 어지러운 때인데 이걸 만들 여력이 있겠느냐. 그리고 너무 잘 만들었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런데 말도 안 되는 건 뭐냐 하면 중국 박산향로가 여기 없겠지만 보면 높이가 20cm밖에 안 되거든요. 그러나 금동대향로는 62. 5cm예요. 규모가 완전히 다르고. 그다음에 문양이나 제작기법을 봐도 중국제 향로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금동향로에 비해서는 뭔가 허접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보시면 알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비교이고 그리고 그 향로와 더불어서 우리가 하나 더 봐야 될 그런 투톱이라고 하는데요. 백제 예술의 투톱 이게 한 점이 더 있죠.

◇ 박재홍> 무늬전돌.

◆ 이기환> 그렇습니다.

◇ 박재홍> 무늬전돌이라고 하는데 부여에 외리에서출토된 무늬전돌인데 그것도 사진 저희가 준비했어요. 함께 보실까요. 맞습니까?

◆ 이기환> 빨간 동그라미가 좀 있으면 중요한 얘기가 되는데 제가 1960년에서 2019년까지 해외 전시를 다니는 한국문화재 순위를 집계한 자료를 봤는데 금관이나 반가사유상을제치고 단연 1위를 한 유물이 바로 저희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무늬전돌인데.

◆ 진중권> 저 전돌은 어디에 사용된 겁니까?

◆ 이기환> 그러니까 바닥에도 사용될 수 있다 바닥재.

◇ 박재홍> 벽재.

◆ 이기환> 아마 벽재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는데 4cm밖에 안 되는데요. 밟으면 깨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래서 벽지가 아니냐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고요.

◇ 박재홍> 벽에다가 붙이는 거를 말하는 거죠.

◆ 진중권> 타일 같은 거군요, 무늬 타일.

◆ 이기환> 그러니까 총 20위에 걸쳐서 6400일 동안 나갔습니다. 기내식 먹었다고 볼 수가 있는 건데요.

◇ 박재홍> 해외에서 인기 많았던.

◆ 이기환> 금관이라든가 반가사유상보다 3배에서 5배 정도 많이 나갔습니다.

◆ 진중권> 그런데 왜 이렇게 인기가 많죠?

◆ 이기환> 이게 어떻게 보면 조금 물건도 작고.

◇ 박재홍> 타일이니까요, 쉽게 말하면.

◆ 이기환> 금동대향로가 출토가 아직 안 돼야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니냐 할 수 있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보면 그게 아니라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왜냐하면 무늬를 보면 한결같이 국보급이다라고 볼 수가 있는데 그중에 보면 동그라미 빨갛게 친 거 있는데 산수인물화의 시원이라는 그런 전돌이 눈에 띄거든요.

◇ 박재홍> 산수인물화가 돌 안에 새겨 있는 거예요?

◆ 이기환> 그렇습니다. 이 산수무늬전돌이라고 하는 거기에 나오는데요. 밑에 보면 물이 있고 중간에 산과 나무 윗부분에 하늘이 있고 오른쪽 하단부에 보면 스님인지 도인인지 모르는 그런 신비의 인물이 암자 같은 그런 팔자기둥 지붕 건물의 향해서 걷고 있어요.

◇ 박재홍> 그러니까 유튜브상에 지금 보이고 있는데 빨간색으로 하신 게 지금 스님 비슷한.

◆ 이기환> 그냥 보면 잘 안 보이기 때문에 했는데.

◇ 박재홍> 그렇기 때문에 빨간색으로 표시해 놓으신 거예요.

◆ 이기환> 그래서 이 전돌이 중국을 포함해서 7세기 당시인데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산수. 또 인물을 곁들인 산수 인물화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 박재홍> 그러니까 저런 산수유물화를 요즘으로 말하면 타일 같은 방식으로 해서 벽에다가 이렇게 장식을 했던 거군요. 표현을 그렇게 했던 거네요.

◆ 김성회> 그럼 이걸 무식한 얘기일 수 있겠습니다마는 한 벽을 다 저렇게 조각한 것을 넣으신 건가요? 아니면 포인트로 이렇게 집어넣었다라고 보세요?

◆ 이기환> 그런데 저게 8개가 있거든요. 8개를 딱 이렇게 이렇게 해 보면 묘하게 이렇게 딱 균형이 잡힌 그런 무늬가 큰 무늬로 이렇게 보이는 그런 게 있어요. 그러니까.

◆ 진중권> 8개가 복합그림처럼.

◆ 이기환> 복합그림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저게 저것뿐만 아니라 많이 있거든요. 그것이 원래는 백제 왕흥사라는 그런 국찰, 왕찰에서 쓰인 것이라고 우리가 판단이 되는데 이것들이 조선시대 끝나고 이러다 보니까 여러 군데 이렇게 나뉘어졌다가 나중에 외리에서 발견된 거죠. 결국 벽채에다 이렇게 하나하나 붙였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박재홍> 그러니까 백제 금동대향로에도 산수화 같은 풍경이 있었고 아까 보여주신 무늬전돌도 산수화 같은 그런 게 있으니까.

◆ 이기환> 그렇습니다. 이 산수화가 사실 중국 6조 시대라고 해서 중국 남쪽 왕조에서 탄생을 했는데 이게 초기 산수화가 중국에서는 없고 가장 어려운 게 물을 표현한 거예요. 우리가 지금은 물 표현하는 게 쉬운 것 같은데 예전에는 6세기, 7세기 때는 물 표현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이게 헷갈렸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도 그럴 것 같은데 중국에서는 그렇게 표현한 게 없는데 이게 우리 무늬전돌을 보면 무슨 귀신문양의 어떤 무늬전돌이나 이런 걸 보면 물이 굉장히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나는 느낌을 표현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문양을 보면 이게 백제금동대향로와 아주 흡사해요. 보시면 알겠지만 무늬전돌을 보면 산이 이렇게 3개 있는 경우 산 화면에 표현이 되는데 이게 금동대향로에 이게 표시가 됐는지 모르겠는데.

◇ 박재홍> 금동대향로 한번 보여줄래요.

◆ 이기환> 금동대향로의 몸체하고 비슷합니다, 산 화면이. 그리고 분위기는 향로의 뚜껑 그림하고 비슷한데... 봉황을 봐도 금동대향로 꼭대기에 있는 봉황이 있잖아요.

◇ 박재홍> 화면으로 지금 보고 계세요.

◆ 이기환> 그것이 아주 외부에 있는 봉황문하고 아주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앞가슴을 내밀고 이렇게 당당하게 이렇게 포즈를 취해 있는 것도 그렇고 그다음에 금동대항로의 밑의 부분에 용받침 문양이 있는데 이것도 외리 출토전돌 중에서 반명무늬전돌이 있습니다. 그거랑 보면 아주 흡사해요. 지금 비교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 박재홍> 비교되고 있어요. 화면에 나가고 있어요.

◆ 이기환> 거의 일치하고 있어서 그래서 혹자는 외리 출도 무늬 전돌 세트를 만든 장인하고 금동대항로를 제작한 장인하고 혹시 동일인물이 아니냐라고까지 할 정도라고 합니다. 굉장히 거의 똑같다라고 하고. 이런 문양들은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죠.

◇ 박재홍> 백제 고유의 그림입니다.

◆ 진중권> 최소한 같은 공장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 박재홍> 같은 공방...

◆ 김성회> 아니면 저런 형태가 저 당시에 유행하는 하나의 사조일 수도.

◆ 이기환> 그렇죠. 그럴 수 있는 거죠. 왜냐하면 그때 도교의 요서도 있거든요. 도교, 불교하고 이렇게 습합하는 그런 측면도 있고 그렇습니다.

◆ 진중권> 하여튼 미감은 엄청 뛰어나서 가끔 가다 백제가 통일했으면 우리가 상당히 미감은 발달해 있지 않았을까.

◆ 이기환> 그게 사실은...

◆ 진중권> 미학자의 진단입니다.

◆ 이기환> 그것이 백제가 사실은 망할 줄 몰랐다라는 거거든요. 왜냐하면 이게 642년에 의자왕이 신라의 40여 개 성을 그렇게 막 윽박지르고 해서 멸망 직전까지 가고 그러잖아요. 그러다가 신라가 이제 으쌰 해서 중국을 찾아가지 않습니까? 648년에 중국과 밀약을 맺죠. 야당 동맹이 밀약을 맺는데 백제가 그것을 몰라요. 모른 것 같아요. 그래서 아까 얘기했듯이 금동대항로 같은 걸 일주일 만에 그렇게 놓으면 한 일주일 뒤에 오면 괜찮겠거니 해서 그랬다가 나중에 이제 망하는 거 그런 게 아닌가.

◇ 박재홍> 660년에 백제가 망했으니까.

◆ 이기환> 그렇죠. 그러니까 몇 년 안 되는 거죠. 651년부터 이제 52년부터는 단교를 하거든요, 중국하고.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참...

◆ 진중권> 국제관계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외교가.

◆ 이기환> 그렇죠. 그렇습니다.

◇ 박재홍> 당시에는 나라는 거의 역사적으로 굉장히 망해가는 시기였지만 문화적으로는 굉장히 융성했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겠 네요.

◆ 진중권> 그러니까 망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신라 침공하고 막 그랬던 거 아니에요.

◆ 이기환>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그걸 몰랐던 거예요. 그러니까 당나라하고 신라가 밀약을 맺었다라는 거. 그리고 밀약을 맺으면서 당나라에서 뭐라고 했냐면 백제가 멸망하면 너희 백제 땅을 줄게, 이렇게 얘기했거든요. 나중에 막상 멸망하고 나니까 또 당나라 바뀌어서 신라를 왜 줘? 옛날 백제 유민들을 너희들이 잘하다가 서로 싸우다가 결국 싸우게 만들고 그랬죠,당나라가.

◇ 박재홍> 그렇군요. 굉장히 흥미롭게 역사 얘기.

◆ 진중권> 백제가 멸망할 때 일본이 막 구호물을 보내지 않습니까?

◆ 이기환> 그래서 백제 멸망 시기가 662년이냐 아니다. 663년에 백강전투라고 하는 대대적인 동북아 최대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거든요, 거기서. 그런데 결국 백제하고의 연합군이 지죠. 그것이 멸망 시점이다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박재홍> 그래요. 백제의 미감을 검이불누화이불치라고설명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건 어떤 의미인가요? 검이불누화이불치

◆ 이기환> 원래 그게 온조왕이 처음에 군실을 만들고 성곽을 만들 때 그렇게 얘기합니다. 하남 위례성을 쌓으면서 유명한 한마디를 남기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검이불누화이불치. 그래서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게라고.

◇ 박재홍> 굉장히 어려운 건데.

◆ 이기환> 그런데 중도를 지키라라는 거죠.

◇ 박재홍> 좋은 말이네요.

◆ 이기환> 어떻게 보면 그게 좀 아닌 게 뭐냐 하면 무령왕릉 출토품도 그렇고 또 나중에 금동대항도 그렇고 여러 가지 문화를 보면 너무 화려하잖아요.

◇ 박재홍> 그렇죠.

◆ 이기환> 그래서 이건 뭐 그런 온조왕의 그런 지시를 안 따라서 지금 망한 거 아니냐 이렇게 얘기하는 건데요. 어떻게 보면 신라도 그랬거든요. 신라도 망하기 50년 전까지도 왕이 얼상루라는 데 올라가서 우리 굉장히 잘 살고 있잖아. 우리가 민간에서도 기와로 지붕을 깔고 뭐 이렇게 하고 숯으로 밥을 짓고 이러잖아요. 그러면서 깔깔대고 웃었다는 거거든요. 그런 다음에 7년 만에 진선여왕 때 급전직하고 50년도 안 돼서 망했다라는 게 신라이기 때문에 서로 그런 면에서 보면 멸망기죠. 그러나 그런 것이 없었다면 진시왕릉이나 만리장성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백성들의 고초가 없었다면 또 그런 화려한 유물을 볼 수가 없는 게 또 아니러니죠.

◇ 박재홍> 한판 클라스 경향신문 흔적의 역사를 연재하고 계신 히스토리텔러 이기환 기자님과 너무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고요. 20초 남았습니다. 기자님 새로 또 준비하고 계시는 연재가 있으시면 어떤 게 있을까요.

◆ 이기환> 최근 복원된 경복궁 향원정에 대한 이야기. 거기에 뼈 아픈 역사가 있다는 거. 왕의 휴식처가 아니라 뼈 아픈 역사가 있다는 걸 다음 주에 보여줄 거고요. 바둑 관련 유물을 신라 영역에서 찾아냈는데 그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다음 주에.

◇ 박재홍> 알겠습니다. 기대해 주시고요. 오늘 함께해 주신 경향신문 이기환 기자였습니다. 고맙습니다.

◆ 이기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