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홍의 한판승부

표준FM 월-금 18:00-19:30

"인터뷰를 인용 보도할 때는 반드시 프로그램명을 밝혀주십시오."
-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 승부>

7/16(금) 대작 무죄 조영남 "조자룡처럼 싸워준 진중권, 평생 은인"
2021.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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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를 인용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 'CBS라디오 <한판승부>'를
정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CBS에 있습니다.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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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CBS 라디오 <한판승부> FM 98.1 (18:25~20:00)
■ 진행 : 박재홍 아나운서
■ 패널 : 진중권 작가, 김성회 정치연구소 씽크와이 소장
■ 대담 : 가수 겸 화가 조영남


◇ 박재홍> 한판승부 개편을 맞아서 이제 한 주를 딱 돌았습니다. 금요일 2부에는 조금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말랑말랑한 코너를 준비합니다. 우리의 교양을 한 단계 높여보는 한판클라스 시간으로 시간으로 준비하는데요. 그래서 오늘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오늘 어떤 분을 모실까. 고민 끝에 오늘 첫 손님은 영원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만능 예술인 조영남 씨를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조영남> 저예요? 죄송합니다.

◇ 박재홍> 조영남 씨 소개했습니다. 스튜디오에 이미 와 계셨는데. 우리 진중권 작가랑 김성회 소장 두 분도 함께 인사 나누시죠.

◆ 진중권> 반갑습니다.

◆ 김성회> 안녕하십니까? 저는 김성회라고 하고요. 저의 어머님 안 여사님이 엄청 팬이셨습니다. 만나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 조영남> 직함은 죄송하지만.

◆ 김성회> 소장이라고 불러주시면 되겠습니다. 김 소장.

◆ 조영남> 어디서 뭐 하시는.

◆ 김성회> 열린민주당에서 당대변인 하고 있는 김성회라고 합니다.

◆ 조영남> 알겠습니다.

◇ 박재홍> 그리고 우리 진중권 작가님 잘 아시죠?

◆ 진중권> 잘 압니다.

◆ 진중권> 오랜만에 뵙습니다.

◆ 조영남> 잘 아는데 저는 처음 만나는 거예요, 오늘.

◇ 박재홍> 오프라인에서 처음 만나시는 거예요?

◆ 조영남> 재판장에서 그냥 슬쩍슬쩍 지나치고. 그전에는 아무 관계도 없었고.

◇ 박재홍> 서로 맞고소를 하셨던 사이인가요?

◆ 진중권> 아니, 제가 증인으로 나갔죠.

◇ 박재홍> 농담이었습니다.

◆ 진중권> 제가 그 재판에 증인으로 나갔었고 1심 재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 박재홍> 그러셨군요.

◆ 조영남> 제 사건 났을 때 물어보지 않은 거 얘기해서 죄송합니다.

◇ 박재홍> 괜찮습니다. 자연스러워요.

◆ 조영남> 제 재판 사건이 났을 때 저의 안티들. 그걸 혼자서, 혼자서 조자룡 칼 쓰듯이 혼자서 막 난리 치고. 나는 그래서 그때 진중권 씨를 처음 봤어요. 나도 모르는 사람인데. 사람들이 나하고는 굉장히 친한 줄 알아. 전혀 모르는 사람.

◇ 박재홍> 오늘 처음, 편한 자리에서 처음 뵈신 거군요.

◆ 조영남> 처음이에요.

◇ 박재홍>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2016년 얘기로 한번 가보겠습니다. 지금 우리 조영남 씨가 얘기를 해 주셔서. 말씀하신 게 그림 대작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죠? 그림 대작 사건이었고 지난 5월에 그 재판이 다 끝난 겁니다, 그렇죠?

◆ 조영남> 네, 전부 끝났죠. 1심에서도 대법원까지.

◇ 박재홍> 그래요. 이제 검찰 얘기는 사기죄에 기만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고 공소 제기를 했는데 미술작품의 저작자가 누구인지는 문제가 아니다라는 판단이 최종적으로 나온 그런 사건이었어요. 5년이었습니다.

◆ 조영남> 5년. 한 6년 돼요. (5년?)

◆ 진중권> 2016년. 2016년부터.

◇ 박재홍> 2016년부터 했으니까.

◆ 진중권> 말은 5년인데 기간은 한 6년에 걸친 거죠.

◇ 박재홍> 지난 6년 어떠셨습니까?

◆ 조영남> 어른들이 유배생활 쫓겨가고 저는 아주 가장 역사적으로 호화로운 유배생활 6년. 완도 이런 섬 같은 데 안 가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좋은 아파트에서.


◆ 김성회> 마포.

◆ 조영남> 아니, 청담동. 어떻게 그렇게 유배생활 멋있게 했죠. 거기서 책 2권도 쓰고 그랬으니까.

◇ 박재홍> 그러셨군요. 그러면서 그동안 재판을 견뎌내신 거죠. (네) 그런데 당시에 이제 논란 당시에 진중권 작가님밖에 도와준 사람이 없었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진 작가님은 그래서 아까도 우리 조영남 씨가 조자룡처럼 수많은 칼을 혼자 받아주셨다고 그러던데요.

◆ 조영남> 난리 났었어요.

◆ 진중권> 그때 난리가 났었는데 저한테는 이제 그런 경우가 3번 있었거든요. 첫 번째가 이제 황우석 사건 때 있었고 두 번째가 심형래 때고. 세 번째가 이 사건이었습니다. 대중 전체랑 싸워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저는 전공자잖아요. 전공자이기 때문에 이건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1917년에 뒤샹 이후에 예술가의 콘셉트와 물리적 실행이라고 그러거든요. 직접 만드는 것이 분리가 이미 됐거든요. 콘셉트를 가진 사람이 저작자지 실제로 그린 사람이 저작자가 아니다라는 게 그 관행이 확립된 지 지났는데 여전히 대중들은 그걸 모르고 심지어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예술계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걸 모른다는 사실이 저는 충격적이었거든요. 저는 제 전공의 관점에서 이건 아닌 건 아닌 거다라고 얘기를 했고 그래서 욕도 많이 먹었죠, 평생 먹을 욕을.

◆ 김성회> 그때 제가 검찰개혁을 주장하는 열린민주당이라는 정당의 소속원이거든요. 저희가 검찰개혁이 되게 중요한 이슈인데 그래서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 박재홍> 잘되고 있어요, 그런데?

◆ 김성회> 열심히만 하는데 잘 안 되고 있습니다. 3명밖에 없고. 뭐 좀 해 보려고 하는데 잘 안 돼서 이렇게 방송에서 열심히 좀 하고 있거든요.

◆ 조영남> 그게 왜 안 될까.

◆ 김성회> 그러니까요. 그래서 이제 여쭤보고 싶은 건데. 저도 이 일이 되게 충격적이고 제가 우리 진중권 작가님이랑 같이 있지만 거의 사사건건 모든 의견이 부딪치는데 지금 말씀하셨던 세 가지 주제는 저는 진중권 작가님이랑 정확하게 동일한 입장이었거든요. 선생님의 사건도 같은 입장으로 봤는데 검찰은 뭐라고 하던가요? 그러니까 수사를 받으셨을 거 아니에요. 직접 가서. 검사들이 예술에 대해서 뭔가 이해하고 물어보던가요?

◆ 조영남> 그러니까 이 미술을 기본을 모르는 거예요. 모르시는 거예요. 검사님들, 변호사님, 재판장님들. 그러니까 그럴 만해요. 제가 이거를 그대로 그려와라. 그랬는데 김성회라는 조수가 그대로 그러왔어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보고 여기서 토씨가 틀린가. 틀린 거 보고서 내가 하라는 대로 했어요. 그러면 사인해요. 이렇게 했으니까 검사님들이 보시기에 이건 완전히 내 그림이 아니고 성회 씨가 그린 거죠. 그리고 내가 팔 때 이건 김성회 조수가 그린 겁니다 이런 걸 안 그렇게 관례상 그렇게 누가 안 해요. 그냥 물건 내놓고 파는 건데 그러니까 검사님들은 한 80%, 90% 했으면 네가 기망한 거다. 사기친 거다. 그래서 사기죄로 걸렸던 거죠.

◆ 김성회> 저는 무슨 질문을 했을지가 너무 궁금해요. 그리고 지금 선생님께서는 대법원까지 재판이 끝나셨기 때문에 일사부재리로 다시 처벌받으실 일은 없어서 검사들이라고 하셔도 됩니다. 님 자는 안 붙이셔도.

◆ 조영남> 그래도 하도 무서워서.

◇ 박재홍>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죠.

◆ 진중권> 검사 한 사람이고 그다음에 부장검사인가 그 사람이 그거를 인가를 해 준 거죠.

◆ 김성회> 그러니까 저는 뭐라고 물어봤을지가 궁금해요. 이거 그리셨냐 이런 걸 물어보던가요?

◆ 조영남> 그런 걸 물었죠.

◆ 김성회> 그래서 안 그렸으니까 사기다?

◆ 조영남> 그렇죠. 어느 부분을 그렸냐. 그러면 이게 그림을 갖다 놓고 조수가 그린 거 이쪽에 다 표시가 돼 있어요. 표시가 돼 있어요. 조수가 불러놓고 표시해 놨으니까 그러면 그걸 퍼센테이지로 보면 거의 한 70%는 조수가 그린 거고 파이널 터치니까.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 이걸 내가 어디서 그걸 수학적으로 몇 퍼센트 이것도 제가 꾸며대는 거고.

◇ 박재홍> 그렇죠. 그건 측정이 불가능한 영역이죠.

◆ 조영남> 제가 무슨 방법으로 알아내요. 그런데 얼추 이렇게 보면 검사님들이랑 나랑 차이가, 조수가 그린 게 많고 그러니까 때려잡아서 너는 사기다 이렇게 된 거죠.

◆ 김성회>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는 검찰개혁이 꼭 필요한 것 같다 이렇게 느껴지시죠?

◆ 진중권> 검찰개혁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건 개인 검사개혁이 필요해.(웃음)

◇ 박재홍> 모든 건 검찰개혁으로.

◆ 김성회> 좀 웃긴 거 아닙니까? 좀 그렇습니다.

◆ 조영남> 왜 웃긴다고 그러세요. 지금 심각한데.

◆ 진중권> 5년 동안 고생하셨는데.

◇ 박재홍> 선생님 아직도 억울하신 것 같아요.

◆ 김성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지난 2016년 그림 '대작 논란' 사건으로 법정에 출두하던 조영남 이한형 기자
지난 2016년 그림 '대작 논란' 사건으로 법정에 출두하던 조영남 이한형 기자
◇ 박재홍> 우리 조영남 씨는 여전히 그때 생각하면 굉장히 당황스러우시고 굉장히 마음이 아프신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예술의 영역에서는 그런 것이 통용되는 것이다라는 것을 우리 진중권 작가님이 법정에서 진술도 하시고 대중과도 좀 소통하시면서 설득하신 부분이 있는 거죠. 아까 이제 마르셀 뒤샹 얘기도 하셨고 또 그런 부분이 다미엔 허스트? 이 작품을 한번 띄워보면서 자세히 설명을 해 줘보세요. 저희가 유튜브로 보시는 분들께는 작품을 한번 화면으로 올려드릴게요. 저 작품이 마르셀 뒤샹 작품의 샘이라는 작품인 거죠, 그렇죠?
샘-마르셀 뒤샹. 조은정 기자.
샘-마르셀 뒤샹. 조은정 기자.


◆ 진중권> 그렇죠. 저거는 시장에서 사온 거거든요. 거기다가 사인만 슬쩍 해 놓고.

◇ 박재홍> 변기를? 변기 맞습니다, 그런데?

◆ 진중권> 저거 변기죠. 소변기입니다. 소변기 엎어놓은 건데 그거를 이제 독립전시회라는 데가 있습니다. 인디펜던스전시회라고 하는 데 냈습니다. 원래는 1달러만 내면 누구 작품이라도 전시해 주겠다 약속을 했거든요. 1달러 내고.

◆ 김성회> 그리고 본인 이름은 안 쓰지 않았나요? 저때?

◆ 진중권> 그때 알 머트라고 썼잖아요. 그런데 저게 변기 제조회사 이름하고 상당히 비슷해요. 가명으로 냈는데 그래서 저게 이제 주최 측 입장에서는 현대미술을 대중한테 친하게 가져가려고 한 전시회인데 저렇게 가면 대중들이 또 현대미술 오해할 것 아닙니까? 이게 장난이야, 뭐 하자는 거야. 그래서 약속을 지키되 깼어요. 어떻게 했냐 하면 전시는 하되 커튼으로 가려놨습니다. 그때 뒤샹이 뭐라고 얘기했냐 하면 뒤샹이 이름이 아니라 다른 여자가 저 작품을 변호하는 글을 썼는데 거기서 물론 이건 작가가 만든 게 아니다. 하지만 작가가 저것을 골랐다라고 해요. 그러니까 이때부터는 고른 거. 그러니까 그게 미적 행위가 되는 거예요.

◇ 박재홍> 고른 것도 미적 행위다? 변기를 사와도 그냥 자기 이름 적어도 그게 그 작품으로 인정될 수 있는 거다?

◆ 진중권> 그게 1917년이잖아요, 저게.

◆ 조영남> 그린 것은 사인밖에 없어요. 뭐 없어요.

◇ 박재홍> 그러니까 조영남 씨도 그림을 사오신 다음에 거기다 조영남 해도 조영남 독립적인 작품이 되는 거죠.

◆ 진중권>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걸 102년 전에 했어야 됩니다. 변기 2개는 필요 없습니다.

◇ 박재홍> 다른 사진 나오고 있습니다. 다미엔 허스트의 신의 사랑을 위하여라는 작품인데 굉장히 작품 사진.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 겁니까?

◆ 진중권> 다미엔 허스트 같은 사람들도 그러니까 모든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작가는 다 자기가 작업을 안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자기 작품을 만들어서 팔리잖아요. 그럼 일단 작품 판 돈으로 조수부터 고용을 해요.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게 내 그림이 어디 가나 있게끔 만드는 게 중요하거든요. 이건 이제 그 맥락과는 좀 다른 건데 다이아몬드가 엄청난 액수의 다이아몬드를 박은 겁니다. 해골바가지인데. 저거는 뭐냐. 사회랑 연동이 돼 있는데 이게 펀드 같은 거예요. 그래서 저걸 만들기 위해서 자기가 뭐 펀드를 발행을 해서. 아마 다미엔 허스트가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을 거예요, 저거. 그다음에 3분의 2는 다른 회사가 소유하고 있고 이런 식의 금융자본주의 현상을 이제 예술계에 도입하는 그런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 조영남> 그리는 거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거예요?

◆ 진중권> 아무 관계없는 거예요. 자기가 만들었겠어요, 저거?

◇ 박재홍> 다미엔 허스트 '신의 사랑을 위하여'라는 작품. 두 작품을 보면서 저희가 이제 어떤 예술작품의 창작활동을 어떻게 봐야 될 것이냐 이 부분을 다시 좀 배워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제 비판의 포인트는 뭐였냐 하면 이게 이 사건에 면죄부를 주면 유명인사들이 자신의 부와 명성을 이용해서 이렇게 고수익을 올리는 폐단을 막을 수 있겠느냐. 그 논리에 많은 분들이 공감을 했었었어요, 사실은. 그러니까 이제 한 99% 정도 미술 전공자 그림 다음에 한 1% 정도를 이제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 이름 쓰면 그럼 그게 그럼 그 사람이 진중권이 그렸다 하면 많이 살 것 아니냐 이런 주장 아니었겠습니까?

◆ 진중권> 저도 그림 그려요? 그럴 리는 없고요. 제가 알기로는 조영남 작가님은 사실 그전부터 활동을 오래하셨고 그림을 거의 그리신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리고 이천몇 년도에 제가 광주 비엔날레 갔을 때 거기서 설치된 작품도 보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중견 작가죠. 그런데 예술계에서는 미디어에 안 나온 사람들을 앉히려고 하거든요. 그런 분위기가 있고.

◇ 박재홍> 정통이 아니다.

◆ 진중권> 그다음에 조영남 씨를 옹호하는 모양 빠지는 걸로 그렇게 이해하는 측면들이 있고 그런데 웃기는 게 뭐냐. 자기들 말대로 정말 조영남 씨가 자기 실력이 아니라 예술적 솜씨가 아니라 유명세를 가지고 작품세를 판다고 그러면 이분의 작품을 사는 분들은 어차피 그 사람들 작품을 안 사요. 전혀 다른 문제거든요. 그런데 왜 거기에다 신경을 쓰는지 이해가 안 되죠, 저는.

◆ 조영남> 정확하게 얘기하셨어요. 걱정이 되는데 그럴 리는 없어요. 사회가. 그렇게 멍청한 사회는 아니에요. 사람들이 눈이 그렇게 아무나 그렇게 돈을 줘서 뭘 해서 한다면 세상에 잘 안 되는 예술가가 어디 있겠어요? 그게 다 쉽게 안 되는 거예요.

◇ 박재홍> 최소한 작품성이 있어야지 또 시장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거거든요. 예술성은 당연히.

◆ 조영남> 그럼요. 돈 내고 사는 사람들이 심각하게 고르겠어요.

◆ 김성회> 현대미술은 구라거든요. 얼마나 내가 이 작품에 대해서 그럴싸하게 설명하느냐가 되게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설명을 포함한 것이 가격에 들어가는 것이고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콘셉트가 나타나고 그것에 독자성과 희소성이 있을 때 그것을 돈을 주고 사는 거지 지금 말씀하신 연예인들 같은 경우는 그냥 본인이 비디오테이프에다가 본인의 모습을 30분 동안 담으면 그냥 그게 훨씬 비싸게 팔릴 거예요, 아마. 작품을 만들지 않아도 연예인들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가 있는 건데 그것과 예술 작품을 비교하는 것은 글쎄요,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 진중권> 사실 저는 신분제가 있는 것 같아요. 조선시대 같은 신분제가 있어서 저는 그런 편견은 몇십 년 동안 작가랑 활동했으면 그분에 대한 미적 평가는 높게 하든 낮게 하든 간에 일단 작가로 인정을 해야 되는데 그 자체를 인정을 안 해 준다는 문화가 저는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 김성회> 문화계에서는 등단을 해야 작가인 거고 행정부에서는 5급 고시 합격을 해야 관료인 우리나라의 이 분위기가 아직 바뀌고 있지 않은 큰 문제가 있는 거죠.

◇ 박재홍> 또 공채 출신이어야 되는 거고.

◆ 진중권> 그런데 옛날에 인상주의 화가들은 다 미대 다니다 때려친 사람들이거든요. 그다음에 앤디 워홀 같은 사람들도 원래 정통 페인팅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지지대를 세워놓고 그리는 게 아니라 책상에 깔아놓고 그리는 만화가라든지 아니면 디자이너 이런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작가로 인정받잖아요. 그런데 이 시대에 그런 아직도 봉건적인 관념을 갖고 있는 게 좀 한심하죠.

◇ 박재홍> 그런데 최근에 보면 구혜선 씨. 구혜선 씨도 이제 배우시잖아요. 그런데 이분도 이제 미술 작품 그리신다 말이죠. 그런데 이제 이 작품을 본 홍대 이 작가라는 분이 굉장히 큰 혹평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술적 가치를 판단하기 어렵다. 아무렇게나 내 느낌을 그린 그림이나 표현을 모두 예술 작품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 아니냐 이렇게 굉장히 혹평을 해서 또 이제 다시 한 번 전문 말씀하신 미대 출신분들이 아닌 분들의 예술작품을 예술성을 인정할 수 있느냐 이 논쟁이 다시 한 번 있었어요. 우리 조영남 씨가 그거 보시면서 어떻게 느끼셨는지.

◆ 조영남> 평론가는 이건 좋은 작품이다, 이건 형편없는 작품이다 그럴 자유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분 평론가에 맡기는 거죠. 그리고 그게 기분 나쁘면 얘기 안 들으면 되고. 이분은 구혜선 씨 작품을 안 좋아하는구나. 그러면 누구를 좋아하나 그렇게 가면 되는 거고. 그렇게 미술에는 100% 자유가 있어요. 음악하고는 정반대예요. 음악은 수없는 규칙이 있고 1에서부터 100까지 전부 규칙이고 2분음표 한 소절에 몇 소절, 몇 박자 들어가야 된다 그거 틀리면 안 되고. 한 음정도 틀리면 안 되고 규칙이 있는데. 미술에는 그런 게 하나도 없어요. 100% 자유예요. 그러니까 평론가가 이건 좋다, 나쁘다 그건 평론가가 할 수 있는 자유죠.

◇ 박재홍> 평론 들어도 실제로 미술하시는 분들은 거기서 상처받으실 필요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시는구나.

◆ 조영남> 그렇죠. 저는 그렇게 해요.

◆ 진중권> 구혜선 씨가 대처를 잘했어요.

◇ 박재홍> 굉장히 쿨하게 반응하셨어요.

◆ 진중권> 화가들이 착각을 하시는 게 원래 미술이 자기 목적이 아니잖아요. 자기들이 그림을 그리고 팔고 이러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좋아하고 그러면서 미적 안목이 높아지고 그 단계 속에서 나도 그리고 싶다 이런 욕망을 만들어내는 데까지가 예술의 과제거든요. 그림들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왜 이렇게 적대적인지 저는 그게 이해가 안 돼요.

◇ 박재홍> 저도 사실 조영남 씨의 작품활동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그림을 한번 배워보고 싶다.

◆ 진중권>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 박재홍> 왜 제 꿈을 꺾으세요.(웃음)

◆ 진중권> 그래서 그때 그런 얘기 많이 들었어요. 야, 그런 거라면 나도 하겠다. 그런 거라면 나도 하겠다라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그러냐 하면 해 봐. 해 봐. 그리고 팔아봐.

◇ 박재홍> 알겠습니다. 일단 한판승부부터 열심히 하고요. 감사합니다. (웃음) 조영남 씨. 그런데 재판은 끝났습니다마는 기사에 보면 최후변론을 하실 때 눈물까지 보이셨다고 했어요.

◆ 조영남> 내 인생에서 제일 수치스러운 장면이에요. 그 얘기 안 해야 돼. 하지 마세요.

◇ 박재홍> 하고 싶지 않으세요?

◆ 조영남> 나는 창피해 죽겠어요.

◇ 박재홍> 그래도 어떤 게 힘드셨기 때문에 그렇게.

◆ 조영남> 그러니까 6년 내 설움이 쌓였던 모양이야. 전혀 그런 생각을 안 했는데 내가 보니까 울먹거리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제일 수치스러워요, 그게. 한 게 후회스럽고.

◇ 박재홍> 이 사회가 어떤 선생님의 예술 활동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러한.

◆ 조영남> 그런 거에 대한 설움이 북받쳤던 것 같아요. 계산은 전혀 그렇게 안 한다, 냉정하게 한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날 그렇게.

◆ 진중권> 탤런트 김수미 씨가 굉장히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저한테도 전화도 하시고 많이 걱정하셨어요.

◆ 조영남> 저는, 저는 독자적으로 진중권 씨가 나를 도운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더라고요.

◇ 박재홍> 그 뒤에 누가 있었습니까?

◆ 진중권> 독자적으로 도왔는데요.

◆ 조영남> 김수미 씨가.

◇ 박재홍> 진중권 씨도 김수미 씨랑 친분이 있으셨어요?

◆ 진중권> 그게 아니라 제가 예전에 그때 그 활동을 했고 그때 김수미 씨가 와서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굉장히 걱정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 박재홍> 그렇군요. 그래서 당시 이제 재판은 대법원에서는 다 무죄 판명이 났습니다만 그 과정 중에서 워낙 또 사회적 논란이 컸었기 때문에 이미 또 우리 조영남 씨의 작품을 사신 분들이 있으셨잖아요.

◆ 조영남> 그렇죠.

◇ 박재홍> 그래서 환불 요청도 있으신 분도 있었나요?

◆ 조영남> 그게 제가 말로 실수한 게 많거든요. 입방정 떨어서. 대통령 앞에서도 각설이타령 불러서 군대 끌려가기를 마음 아파서 불러서 끌려가고. 그런데 제일 큰 게 그게 있어요. 내가 내 그림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면 가져와라. 그럼 내가 환불해 주겠다 그 얘기를 안 했어야 되는데. 나는 설마 내 그림을 환불까지 요청하랴


◇ 박재홍> 큰 아픔이 있으셨으니까 또 문제가 없는 방향으로 진행을 하고 계십니다. 조영남 씨 만나고 있고요. 방송 듣고 있는 청취자분들이 또 질문을 주고 계세요. 조영남 작가님께 질문을 SG양 님인데요.

◆ 조영남> 여자예요?

◇ 박재홍> 양이니까.

◆ 김성회> 제 팬이십니다.

◇ 박재홍> NFT 아트에 대한 조영남 씨의 생각이 궁금하다고 하셨는데 NFT라는 아트라는 장르가 있나요?

◆ 조영남> 저는 모르는데 몇 번 들었어요. 몇 번 들어도 모르겠어요, 뭔지.

◇ 박재홍> 그래서 우리 진중권 작가님이 설명해 주세요. 뭡니까, NFT아트가.

◆ 진중권> 지금 이제 뭐의 약어인지를 까먹었는데요.

◆ 김성회> 대체 불가능한 토큰.

◆ 진중권> 대체 불가능한 토큰이고요. 어떤 일들이 생기냐 하면 이게 이런 문제거든요. 그러니까 누구예요. 그라피티 아티스트 있잖아요. 아니, 뱅크시. 뱅크시 작품이 물론 판화입니다. 여러 장치를 한 판화이기는 한데 그 판화를 복제를 해서 그걸 갖다가 토큰으로 만든 다음에 디지털 실체만 있는 거죠. 그런 다음에 이게 또 유일성이어야 되잖아요. 원본이 있으면 이게 유일적이지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원본을 파괴해버리고 이것만 남는 거예요. 이거는 진짜 완전히 순수 자본주의적 현상이 되는 거죠. 금융자본주의. 예를 들어서 옛날에는 아시죠? 뇌물을 줄 때도 박스에다가 줬잖아요. 요즘은 모든 게 계좌에서 숫자만 왔다갔다 하잖아요. 그게 미술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 건데 한편으로 보게 되면 이게 진보적인 예술 현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게 과연 예술인가. 원본으로 파괴까지 한다면 예를 들어서 모나리자가 있는데 이 사람들이 중요한 것이 작품성 자체가 아니라 이게 하나다라는 것만 중요한 거예요. 하나다라는 것만.

◆ 조영남> 저는 아직도 못 알아듣겠어요. 그런데 그 질문하신 분한테 어저께 조영남은 그거 거래상하고 계약 맺었다는 거고.

◇ 박재홍> NFT 아트 작품 하나 만드시기로.

◆ 김성회> 그러니까 선생님 작품을 하나 만드시면 누군가 그거를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그림을 온라인상에다 올려놓은 다음에 그 그림을 1000조각을 내서 조각당 1만 원씩 파는 거죠. 그럼 1000조각이니까 그게 선생님께 입금이 되고 그 1000만 원의 조각은 그 그림이 떠다니면서 1조각에 1만 원을 누구는 3만 원에 팔기도 하고 누구는 5만 원에 팔기도 하고. 그런데 기록이 계속 남으니까 하나의 그림을 1000명이 소유하면서 각각의 자기 원하는 가격에 사고파는데 이게 암호화 기술로 인해서 어디로 가도 위조가 안 돼서 10년, 100년이 지나고 사이버상에 남아 있으면서 예술이 계속 남아 있는 형태를 새로 개발한. 요즘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이렇게까지 살지는 않지만 사이버 인생을 살다가 점점 더 나아가서 내 자신의 육체를 없애고 내 자신이 내가 사이버만 남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나올 정도로. 공상과학소설입니다만.

◆ 진중권> 아까 우리가 다이아몬드 박힌 해골 있잖아요. 신의 사랑을 위하여. 그것도 사실 나눈 거거든요, 3분의 1 지분을 나눠서 자본주의시장경제처럼. 그런데 그런 실체가 있어요, 아직은. 다이아몬드를 가진, 다이아몬드가 박힌 해골이라는 실체가 있었는데 여기는 실체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작품을 만들게 되면 그거 원본을 파괴하셔야 될 거예요, 아마.

◇ 박재홍> 원본이 파괴되니까 재미가 없.

◆ 조영남> 재미 없어요.

◇ 박재홍> 우리 조영남 씨는 재미없으시답니다.

◆ 진중권> 왜냐하면 원본이 있는 가치가 없어지거든요.

◆ 김성회> NFT가 재미없으시다는 말씀이시죠. 빨리 다음 주제로.

◆ 조영남> 박재홍씨. 옛날 가수에 박재홍 씨가 있는 거 아세요?

◆ 김성회> 울고 넘는 박달재. 알고 있습니다.

◆ 조영남> 제가 참 좋아하는 가수인데.

◇ 박재홍> 제가 청담동 한번 가겠습니다, 선생님.

◆ 조영남> 화제를 돌리려고. 화제를 돌리려고.

◇ 박재홍> 알겠습니다. 화제를 돌리겠습니다. 재판장 여기까지 하고요. 한판클라스 함께하고 계십니다. 잠시만요. 한판클라스 함께하고 계시고요. 방송을 너무나 잘 아시는 조영남 씨가 재미없는 이야기 그만하라고 하셔서 바로 끊고 또 재미있는 얘기로 가려고 합니다. 다시 이제 행복하게 미술활동을 시작한 조영남 씨 얘기를 듣고 있고요. 화가로 만들어주신 분은 아침이슬의 김민기 씨라고요.

◆ 조영남> 동기가 됐죠.

◇ 박재홍> 동기.

◆ 조영남> 군대를 들어갔는데 육군본부를 들어갔어요. 그런데 육군본부에서 근무를 하려니까 저는 행정병이었거든요. 근무를 하려고 하니까 복도에 여군들, 군인들이 다 기웃거리고 여군들이 막 저한테 최고 가수였으니까.

◇ 박재홍> 인기가 많으셨으니까.

◆ 조영남> 톱가수였으니까. 조영필 뭐 서태지 아이돌 급이었으니까.

◆ 김성회> 딜라일라 다음이었으니까.

◆ 조영남> 그렇죠. 바로. 그러니까 중대장님이 야야야, 일이 안 된다. 너 가서 있다가. 어디 가 있다가 육군에 가서 청소하다가 점호 끝날 때 와라. 그러니까 시간이 남죠. 그런 때에 김민기를 만난 거예요. 김민기를 만난 거예요. 김민기를 보고. 보니까 이놈이 이렇게 TV 나와서 이렇게 양반다리하고 기타를 치는데 심상치 않더라고. 그래서 봤더니 미대, 서울 미대 회화과 2학년이었어요.

◆ 진중권> 군대에서 만났. 군대에서.

◆ 조영남> 나 군대에 있을 때.

◆ 진중권> 그분들은.

◆ 조영남> 걔는 학생 때고. 5살 차이니까.

◆ 김성회> 그런데 육군본부에서 만나셨다고요?

◆ 조영남> 아니요. 제가 바깥 나가서.

◇ 박재홍> 휴가 나가셨는데.

◆ 조영남> 나가서 만나서 얘기하다가 걔네들 그림 미대 가서 야, 인마 내가 너희들처럼 그러려면 발가락이라도 이렇게 그리겠다. 저 고등학교 때 미술부장이었거든요. 민기가 하하하. 걔가 목소리가 커요. 느닷없이 하하하하. 형이, 형이 미술을 해야 돼. 그래서 그때부터 미술을 하고 하루 종일 나는 그림 그리고 음대생인데 그림 그리고 그러면 미대생인데 하루 종일 제 옆에서 기타 치고.

◇ 박재홍> 서로 전공이 바뀌어서.

◆ 조영남> 그러다가 이제 미국 가기 전에 그림이 쌓이니까 화랑 전시를 하자고 그러더라고. 걔가 머리가 무지하게 좋은 애예요. 미대생인데 허락을 받아야 된다. 그래서 미대 교수한테 그러니까 가지고 가서 내 그림 보여주고 첫 번째 전시를 하게 됐죠. 그게 다 김민기가. 그리고 브러셔 만드는 데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추천서. 그런 거 쓸 사람 없으니까 허허 자기가 쓴다고 그러고. 지가 썼는데 기가 막혀요. 지금이라도. 아주 명문이었어요. 그러니까 미술을 민기가 저한테 하게 한 역할이 크죠.

◇ 박재홍> 그렇군요.

◆ 조영남> 자기는 그림을 안 하고 그놈은 하루 종일 뮤지컬 하다가 학전 운영하고.

◇ 박재홍> 그래서 이제 미술가로서의 삶이 잘 시작이 됐는데 아까 화투 얘기하셨잖아요. 화투 이용하신 건 언제부터이신 거예요?

◆ 조영남> 그건 가만히 보니까 미국 가서 독학을 하기 시작했어요.

◇ 박재홍> 미술에 대해서.

◆ 조영남> 미술을 내가 독학을 했는데 보니까 앤디 워홀이 콜라병을 딱 그린 것을. 이걸 한국 사람이 콜라보다 좋아하는 게 뭘까. 보니까 사람들이 이민을 와서 그때 플로리다 이민 왔는데도 화투 치더라고. 화투 그 안에 그림이 있어. 그런데 그 그림 사람들이 화투 안에 그림 있는 걸 몰라. 실제로 이상해요.

◇ 박재홍> 대충은 안다는 거죠?

◆ 조영남> 그냥 화투로. 그림만 알지 그림이 있다는 걸 몰라.

◇ 박재홍> 청단, 홍단만 알고.

◆ 조영남> 그렇죠. 그러면서 그 안에 그림이 또 오방색이야. 우리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이거 그림 되겠다. 그래서 앤디 워홀 흉내를 낸 거죠. 그래서 화투를 그리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이 꽉 히트를 친 거죠.

◆ 김성회> 그래서 오늘 콜라 옷을 입고 오신 겁니까?

◆ 조영남> 네.

◇ 박재홍> 그래요. 그러면서 이제 우리 조영남 씨의 작가 생활이 계속 이제 잘 이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사망 장례식이라는 퍼포먼스도 하셨어요.

◆ 조영남> 조셉 보이스하고 2인전을 하자고.

◇ 박재홍> 조셉 보이스요?

◆ 조영남> 조셉 보이스가 백남준 1류로 만든 독일 1호인가 그러거든요. 독일의 진중권이죠.

◇ 박재홍> 독일의 진중권. 설명해 주세요. 진 작가님, 어떤 분인지.

◆ 진중권> 조섭 보이스는 저 같은 평론가는 아니고 작가였습니다.

◆ 조영남> 작가고 이론가고.

◆ 진중권> 플럭서스운동의 대표적인 사람이었고.

◆ 조영남> 이론가고.

◆ 진중권> 이론가이기도 하고.

◇ 박재홍> 그렇군요.

◆ 조영남> 백남준을 1류로 만든 지대한 사람이죠.

◇ 박재홍> 그렇군요.

◆ 조영남> 그분하고 그분이 죽었을 때예요. 죽었을 때 그러니까 내가 조셉 보이스나 백남준은 죽었으니까 내가 만나려면 죽어야 된다. 그래서 1회 장례식을 치렀죠. 최후의 장례식을.

◇ 박재홍> 1회 장례식.

◆ 조영남> 그때 관을 만들어서 관을 든 친구가 이문세가 앞장서서 어이, 어이, 어이. 북망산이 어디냐. 니 그거 이문세가. 내가 신세를 갚아야 되는데 아직도 못 갚았어요.

◇ 박재홍> 이문세 씨가.

◆ 조영남> 내가 그림을 한 점 주려고 그래요,이문세한테. 고맙다고.

◇ 박재홍> 그렇군요. 왠지 우리 조영남 씨 얘기하셨지만 장례식 퍼포먼스 예술에서 많이 이용이 되는 겁니까? 진중권 선생님이 설명해 주시면.

◆ 진중권> 많이 이용되는 건 아니지만 옛날에 백남준이 그런 퍼포먼스를 했었거든요. 관중석으로 들어가서 넥타이를 가위로 자르는 그런 퍼포먼스를 했는데 그거를 재연을 한 거죠. 백남준 장례식에서 조문객들이 자기 넥타이를 칼로 잘라서 관 위에 올려놓는 아주 유서 깊은, 뭐랄까 유서 깊은 사건에 대한 아주 훌륭한 미학적인 세리머니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 박재홍> 그렇군요. 조영남 씨와 함께하고 있는데요. 조영남 씨가 갑자기 노래 비슷한 거 하셔서 우리 또 지금 청취자분들께서 노래 좀 듣고 싶다 이렇게 요청을.

◆ 조영남> 제가 저를 가수로 아는 사람이 있어요?

◆ 김성회> 저희 어머니.

◆ 조영남> 어머니 성함이 어떻게?

◆ 김성회> 선희 씨.

◆ 진중권> 내가 많이 나이가 들었다는 걸 느끼거든요. 저때도 사실은 우리 세대도 저도 많이 들었거든요.

◆ 김성회> 저도 선생님 음악 많이 들었죠. 어머니 워낙 젊으셨을 때부터 좋아하셨다는 얘기고 저도 화개장터 많이 듣고 자랐죠.

◆ 조영남> 목소리가 좋은데 가수 하지 그랬어요.

◆ 진중권> 저는 실황 공연하신 것 있지 않습니까? 그걸 판을 하나 내셨는데 그 판을 옛날에 갖고 있었습니다. 토크하는 것도.

◇ 박재홍> 그래서 조자룡. 조자룡으로 활동하신 거예요.

◆ 조영남> 누나가 진은숙. 누나인가? 제 서울대 후배. 작곡 요새 세계적이야. 알고 계셨어요?

◇ 박재홍> 그럼요.

◆ 조영남> 알고 계셨구나.

◇ 박재홍> 그래서 이제 우리 가수의 시간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가수 조영남 씨와 함께하고 있는데.

◆ 조영남> 그 가수가 늙었어요, 이제.

◇ 박재홍> 늙으셨는데 그래도 목소리는 여전하신 것 같아요.

◆ 조영남> 아니야.

◆ 김성회> 선생님, 아까 장례식 얘기가 나왔으니까 좀 불경스러운 질문이기는 한데 어쨌든 가수 같은 경우 돌아가실 때 본인의 장례식 때 본인의 어떤 히트곡 이런 거나 좀 이런 노래들을 추모하는 분들이 와서 부르기도 하고 이럴 것 같은데 선생님 장례식에는 선생님 곡 중에서 어떤 곡이 불려졌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해 보셨어요, 혹시?

◆ 조영남> 장례식 때 그런 관습이 있어요. 가수증명서만 있으면 가수장을 치러주거든요. 그런데 고복수 선생 사모님 황금심 여사 때는 우리 가수들 쭉 와서 마지막에 사회자가 일어나서 알뜰한 당신. 나는 우스워서.

◇ 박재홍> 우스우셨어요?

◆ 조영남> 장례식장에서 알뜰한 당신 하니까 얼마나 우스워요. 혀를 깨물면서 웃었죠.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고은봉 씨가 돌아가셔서 그때 장례식 때는 울려고 내가 왔던가. 집에 가서 생각하니까 이게 장난이 아니야. 조영남이 죽으면 합창을 딜라일라 영어 들어가는데 어떻게 해요? 제일 박자가 어려운데. 천상 "구경 한번 와보세요~"

◇ 박재홍> (웃음)그런데 장례식장에서 화개장터가 약간 무리한데요?

◆ 조영남> 재미있을 거예요. 그래서 그때는 정신 차리고 이거 하나 녹음해서 장례식 때 불러야겠다고 한 게 모란동백이에요.

◇ 박재홍> 모란동백.

◆ 김성회> 화개장터로 안 되겠다 생각하셔서.

◆ 진중권> 화개장터는 도저히 안 되는.

◆ 김성회> 그렇네요.

◇ 박재홍> 그러면 일단 그러면 모란동백 그게 장례식 때 듣고 싶은 곡이라고 하셨으니까 모란동백을 한번 저희가 준비해 볼게요.

◆ 조영남> 그러면 그걸 하세요. 아유, 나 죽었다고 생각하고. 기독교 방송이 지금 장례식장으로.

◇ 박재홍> 일단은 저희가 경건한 마음으로 듣겠습니다. 모란동백 조영남 씨의 라이브로 한번 듣겠습니다.

◆ 조영남> 시인 이제하, 제주도 사시는.
(모란동백 노래)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동백은 벌써 지고 없는데 들녘에 눈이 내리면 상냥한 얼굴 동백 아가씨 꿈속에 웃고 오네 세상은 바람불고 덧없어라 나 어느 바다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모랫벌에 외로히 외로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동백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 김성회> 어머니 무지하게 좋아하셨을 거예요. 지난 10년간 최고의 효도가 아니었을까.

◇ 박재홍> 김성회 소장님 갑자기 친해지셨어요. 모란동백. 우리 조영남 씨가 실제 장례식 때 흘러나왔으면 하는 음악. 지금 그런데 굉장히 음악 노래 부르시면서 잊지 말아요, 나를 잊지 말아요라고 말씀하셨잖아요.

◆ 조영남> 비겁한 내용이죠, 가사가.

◇ 박재홍> 누가 생각나셨습니까?

◆ 조영남> 선영 씨가 생각나요.

◆ 김성회> 선희입니다, 희.

◇ 박재홍> 선희 씨. 김성회 소장님 어머니. 이제 가수의 시간으로 다시 넘어갔습니다. 우리 조영남 씨의 가수의 시간 얘기할 텐데 사실은 가수로서 세상에 알려지신 건 딜라일라예요. 그때 정말 어마어마하게 히트를 하면서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으셨는데 어느 정도였어요?

◆ 조영남> 그걸 자꾸 묻는데 그걸 본인 지금 젊은 친구들한테 하고 싶은 얘기인데 자기가 인기 있을 때는 몰라요, 젊었을 때는. 나이 들면 그때 내가 인기가 있었구나 이렇게 돼. 참 젊음이 아프니까 젊음 그거 거짓말이에요. 모르니까 젊은 거예요. 몰라요. 몰라. 그걸 알면 어떡하게. 그러니까 무사히 잘 지나왔지. 모르니까.

◇ 박재홍> 알았으면 큰일 날뻔했습니까?

◆ 조영남> 그럼요. 얼마나 내가 건방져지고 세상 없는 것처럼 까불고 그랬겠죠. 그렇지 않아도 그랬는데.

◆ 진중권> 혹시 영화 쎄시봉은 당연히 보셨겠죠. 거기 묘사된 조영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조영남> 말도 안 돼요.

◇ 박재홍> 왜 말도 안 되세요?

◆ 조영남> 아니, 팩트로 어느 정도 갔으면 성공했을 텐데 너무 픽션을 섞어서 말도 안 되는 스토리로 해서 흥행이 안 됐어요.

◇ 박재홍> 아까 군대 얘기 잠깐 하셨잖아요. 군입대할 때 굉장히 해프닝도 있었다고 최근에 또 글들이 왔었는데 그 얘기 좀 우리 청취자분들께 해 주시면.

◆ 조영남> 김시스터즈 왔을 때 김시스터즈가 우리나라의 한류의 원조라고 볼 수 있죠. 한류의 최고 넘버원. 제일. 찰리 브라운~ 하던 그 그룹이 왔을 때 제가 MC였었어요. 노래도 하고. 그런데 잘했어요. 나가서 딱 나가서 인산인해 아니야. 시민회관, 옛날. 지금은 세종문화회관. A 마이너 코드 찍고 신고산이 우르르르르 하면서 생각한 거예요. 엊그제 본 와우 아파트 무너진게 생각이 난 거예요.

◇ 박재홍> 비극이었죠. 굉장히 비극적인 사건이었는데.

◆ 조영남> 그게 순간적으로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아파트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누나. 어랑어랑 이렇게 막 아우성 치고 난리가 났어요. 그런데 시민회관하고 서울 시청이 가깝잖아요. 거기 간부가 하나 왔었겠죠. 듣고 저놈 왜 까불어 저렇게. 그렇게 해서 군대 끌려간 거죠.

◆ 김성회> 바로 가셨나요?

◆ 조영남> 그 다음 날 왔어요.

◆ 김성회> 그 다음 날요?

◆ 조영남> 새벽에.

◆ 진중권> 강제징집 1호십니다. (웃음)

◆ 김성회> 그때는 좀 이름 있는 가수셨죠?

◆ 조영남> 최고였었죠.

◆ 김성회> 그러니까요. 딜라일라 다음에.

◆ 조영남> 그때 군대 가기를 제일 잘했어요. 지금 그때 거의 안 갈 수 있었는데 그때는 뭐 좀 푼돈 쥐어주고 중이염 있다, 눈 아프다 그러면 미뤄줬어요. 지금은 정말 개혁된 거예요. 개혁이 뭐.

◇ 박재홍> 개혁에 관심 많으시네요. 조영남 씨. 검찰개혁 잘 되고 있나 물어보시고.

◆ 조영남> 문화가 컬쳐, 컬쳐가 개혁이죠. 그러니까 그때만 해도 미개한 시대니까 군대 안 가버릴 때 그 노래 불러서 군대 가게 됐죠.

◆ 김성회> 그 다음 날 실제로 군복 입은 사람들이 와서.

◆ 조영남> 아니요. 홍성재판소에서. 예산에는 재판소가 없어요, 한 정거장 가면 홍성 거기에 법원이 있거든요. 거기서 저를 잡으러 와서 새벽에 갔었죠, 그 다음 날.

◆ 김성회> 요즘 일로는 잘 이해도 안 되는. 어떻게.

◆ 조영남> 옛날에는 그때가.

◆ 김성회> 사법부에서 왜 잡으러 와서 군대를 보내고

◆ 조영남> 이조말이니까. 임진왜란 막 끝나고.

◆ 진중권> 80년대는 방학 끝나고 나면 애들이 없었졌잖아요. 군대 가 있었고. (웃음)

◇ 박재홍> 말씀하시는 딜라일라 또 제비도 번안곡입니다. 번안곡은 정말 히트 엄청 많이 했습니다,우리 조영남 씨의 곡이.

◆ 조영남> 그때는 번안곡이 유행했었어요. '1. 4 후퇴 때 피난 내려와 살다 정든' 이거 번안곡이에요.

◇ 박재홍> 그래요? 그렇군요.

◆ 조영남> 두메나 산골 가사를 제가 만든 거죠. 왜 했냐고 물어봐야죠.

◇ 박재홍> 왜 그러셨어요? 방송 배우겠습니다. 왜 그러셨어요?

◆ 조영남> 그때 편곡이 편곡자가 많지가 않으니까 그때 들은 걸 번안곡은 편곡 그대로만 하면 끝나거든요. 그러니까 번안곡을 많이 했죠.

◆ 김성회> 주변에 김민기 같은 훌륭한 작곡가도 있으셨는데 제가 저도 선생님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라 화개장터가 나오기 전까지 제일 아쉬워 아쉬웠던 게 '쇼쇼쇼' 이런 데서 많이 뵙거든요. 항상 불안했던 게 박자대로 안 부르고 본인 박자대로 막 나가니까 그런 게 재미있으면서도 왜 저분은 저렇게 좋은 성대에 번안곡만 이렇게 부르실까. 자기 노래가 있을 법도 한데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그때는 그리고 다른 가수들은 그래도 본인 노래들을 그러니까 주변에 작곡가를 해서라도 했을 때 텐데 그래도 번안곡을 더 선호하셨던 이유가 있는지 궁금했었어요.

◆ 조영남> 번안곡이 멋있었죠, 국산 보다 외국산, 그때는.

◆ 김성회> 딜라일라 무대 때도 보면 그러니까 데릴라 아닙니까? 삼손 옆에 데릴라인 여성들을 막 데리고 올라갔던 것도 선생님 아이디어였나요?

◆ 조영남> 별 난리 다 쳤죠.

◆ 김성회> 그러니까 그때 내가 이렇게 한번 무대를 만들어봐야 되겠다 생각을 하고.

◆ 조영남> 그렇죠. 그때 웃통 다 벗고 칼 딱 들고.

◆ 김성회> 그러니까요.

◇ 박재홍> 그래서 이제 아까 말씀하신 대로 작곡하신 게 화개장터. 그리고 다음으로 유명한 곡이 겸손은 힘들어입니다. 사실은 겸손은 힘들어. 이게 이제 2012년에 리메이크가 되면서 굉장히 또 유명해지기도 했는데 제목이 참 마음에 듭니다. 겸손은 힘들어.

◆ 조영남> 제가 평생 안 됐던 게.

◇ 박재홍> 겸손.

◆ 조영남> 겸손이에요. 그게 그렇게 참 잘 안 되더라고요.

◇ 박재홍> 겸손이 왜 이렇게 힘들죠?

◆ 조영남> 글쎄 말이에요.

◇ 박재홍> 인간의 본성이 겸손은 힘들지 않습니까, 선생님?

◆ 조영남> 그냥 겸손해라 겸손해라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노래를 만들었죠.

◆ 김성회> 원래 그냥 해서 다 되시는 분들은 겸손하기가 어려워요. 그러니까 예를 들면 선생님 같은 경우는 고등학교 때도 성악 같은 거 노래 남이 부른 거 한 번 들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쉼표도 한 번 안 틀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수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노래는 그냥 부르면 되는 거 아닌가? 겸손할 틈이 없었죠.

◇ 박재홍> 유튜브에 선생님 노래 영상 같은 거 보면 내가 다른 건 모르겠는데 목소리나 성대는 조영남이 대한민국 최고다 이런 댓글이 굉장히 많아요.

◆ 조영남> 그래요?

◇ 박재홍> 그런 댓글 보시면 그런 말 들으시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 조영남> 그런가 보다. 그랬나?

◇ 박재홍> (웃음)그래요. 사실 한국 사회가 겸손 말씀하셨지만 겸손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겸손.

◆ 조영남> 그 정의를 내릴 수가 있어요?

◇ 박재홍> 그러니까 겸손이 좀 뭐랄까, 아닌 척하는 것보다는 스스로의 능력을 인정하는 뭐 이런 게 필요할 것 같은데.

◆ 진중권> 겸손하라고 말하는 나라가 참 많지 않아요.

◇ 박재홍> 그렇군요.

◆ 조영남> 그렇구나.

◇ 박재홍> 겸손은 강요하지 말아야 되는구나.

◆ 진중권> 강요하지 말아야 되는데.

◆ 조영남> 그렇죠. 그렇게 돼야 되는데 맞아요.

◇ 박재홍> 그런데 시간이 벌써 다 돼버렸습니다, 여러분. 좀 아쉬운데.

◆ 조영남> 좀 늘릴 수 있나? 옛날 같으면.

◇ 박재홍> 다음에 한번 더 모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게 지금 가수 조영남의 시대로 한 판 더 저희가 모셔야 될 것 같고. 저희가 30초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이제 재미스트 조영남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다 청취자분들께.

◆ 조영남> 저는 그런 거 없어요. 그냥 하루하루 사는 거죠.

◇ 박재홍> 하루하루. 앞으로 새로운 재미 어떤 거 추구하실지.

◆ 조영남> 그런 거 생각하기도 싫고.

◇ 박재홍> 하루하루.

◆ 조영남> 그냥 내가 진중권 또 박재홍, 김성회하고 만나서 어떻게 다 이렇게 잘 꾸려갈까. 마지막 인사를 어떻게 할까. PD하고 어떻게 인사하고 헤어질까 이렇게 엔지니어하고 얼마큼 내가 이게 급하지 지금 내가 내일 어떻게 될지 어떻게 알아요.

◇ 박재홍> 알겠습니다. 오늘도 재미있었습니다. 한판클라스 첫 손님 조영남 씨로 너무나 재미있게 잘 해 주셨고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 조영남> 잘했어요?

◇ 박재홍> 정말입니다. 아주 좋았습니다. 조영남 씨 감사합니다.

◆ 조영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