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신의 그대와 여는 아침

음악FM 매일 07:00-09:00
1223화 멍하니 시간을 세는.. 기다림의 정서가 그립다
그대아침
202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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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탈 일이 없던 유년 시절, 나는 퇴근하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버스정류장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저녁 여섯시 반쯤 집에서 몰래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해,
일곱시쯤 일을 마치고 도착하는 아버지를 정류장 한편에 쭈그리고 앉아 한없이 기다렸다.
아버지가 타고 오는 103번 버스가 저 멀리서 보이면 얼마나 떨리고 설레던지.
버스가 멈추면, 내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며 나와 닮은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가 내리지 않으면 다음 버스를 기다리며 한쪽에 쭈그려 앉고,
저 멀리 독립문 뒤 안산으로 떨어지는 석양에 애타는 마음을 잠시 걸쳐놓곤 했다.
그렇게 내 마음도 붉게 익어갈 무렵, 한 삼십 분 더 기다리다 아버지를 만나면
집에 올라가는 길에 과자와 바나나우유를 손에 쥐고 얼마나 행복했던가. 

공간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기능이 약해지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특히 요즘 같은 디지털 비대면 시대에는 모빌리티 개념과 이를 구현해주는 기술이 등장하면서
이동의 공간과 정서가 바뀌고 있다. 그 가운데 내게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공간이 버스 정류장이다.
예전에 비하면 요즘 버스 정류장은 매우 좋아졌다. 비를 피할 수 있는 번듯한 셸터도 생기고,
커다란 디지털 안내판도 있다. 그런데 나는 왜 버스 정류장이라는 공간이 점점
사라져간다는 느낌이 들까?

버스 정류장은 기다림의 장소다. 어디론가 가야 하는 상황에서 속수무책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시간을 세는 장소가 버스 정류장이었다. 그곳은 수많은 인파와 차량의 흐름 속에서도
멈춰 있는 자신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고, 버스나 버스를 타고 오는 누군가를 간절하게 기다리며
기다림의 시간 속에 스며든 도시 풍경을 어느 때보다 평온하게 음미할 수 있는 일상의 장소였다.
지금은 버스 정류장이 더 커졌지만 이런 정서가 스며들 시간이 없다. 늘 예측 가능한 상황 속에서
세상이 펼쳐지고 언제 어디서든 서로 연결된 상태이기에, 미지의 기다림과 만남의 정서가 사라져가고
있다. 사실 이런 세상의 변화를 핑계 대지만 이미 내 마음이 누군가를 무턱대고 기다리기엔
여유 없이 비좁아지고,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생활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
스마트폰이 아니라 딱딱하게 굳어가는 내 마음과 삶을 돌아봐야 하는 건 아닌가 잠시 생각해본다. 

*박성진의 <모든 장소의 기억>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