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신의 그대와 여는 아침

음악FM 매일 07:00-09:00
0508금 '그랴~' 모든 걸 품어주는 아버지의 큰말
그대아침
2026.05.08
조회 218
꽃과 풀은 바람이 전해준 세상 얘기를 도란도란 나눈다.
나무는 큰 가지를 흔들며 추임새를 넣는다. 살다보면 사람이나 동물들, 사물에도
바른길을 안내하는 지침서가 있다. 바람이 나뭇잎에 들려주는 말은 영양분처럼
이파리를 살찌우고 품을 넓힌다. 어떤 말에는 영양소보다 더 많은 지혜가 담겨 있다.
아버지가 내게 늘 하셨던 그 말씀처럼…

'그랴' 이는 아버지가 생전에 즐겨 사용하던 말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워 심리적 공감대와 연결감을 주고, 모든 걸 품어주는 큰 말이었다.
돌아보면 그 말 한마디 안에서 나는 푸르게 자랐고 안전하게 꿈을 꾸었다.
아버지의 '그랴'라는 짧은 단어는 평화롭고 달콤했다. 예민했던 질풍노도의 성장기에도
마음 온도를 알맞게 데워준 말이었다. 옳은 일, 바른 일은 물론이고 위로와 용기가
필요할 때, 등을 다독이며 믿음을 주었다. '그랴'라는 말을 가만히 발음해보면,
보름달같이 밝고 부드러우며 명랑한 음률이 동심원처럼 퍼져나간다.
할머니가 쌈짓돈을 헐어 손자들에게 사주셨던 비타민처럼 힘이 솟구친다.
당연히 내게는 믿음이고 큰 의지였다.

나는 줄곧 아버지의 '그랴' 덕분에, 청춘의 뒤안길에서 희망이 골절된 목록들도
비교적 잘 견딜 수 있었다. 첫사랑에 탈이 나고 내 안으로 먹구름이 이주해올 때도
침침한 불행들은 다행히 의식 속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 이상 얼룩지거나
눅눅해지지 않는 법을 배웠다. 또한,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데 
든든하고 푹신한 의자가 되어주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뒷산의 칼바람도, 
운명을 찢는 사나운 불행도, 시원하게 대숲처럼 가라앉히는 법을 아셨던 것일까?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버지의 반듯함과 융통성과 너그러운 사유를 나는 조금씩 일깨웠고
배워갔다. 그로 인해 힘든 일이 생길 때면 더욱 야무지고 단단해졌다.

저물어가는 햇살의 잔영을 모아 바람이 호수를 가로지른다.
그 바람의 마지막 여백에 서둘러 내 마음을 새겨 보낸다. 아마도 오늘 밤은
아버지가 '잘 지내지? 그랴?' 하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내게 다녀가실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당신을 닮은 어조로 그랴,라고 낮고 고요하게 불러본다. 
어둠 속에 가만히 별 하나가 켜진다.

*2026 [더 수필]에 수록된 김은숙의 <그랴>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