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숙이의 별명은 '짬숙이'였다. 잠을 너무 많이 잔다고 해서 동년배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음습하고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고교 기숙사 시절에 맑게 풀어진 짬숙이의 '졸린 눈'은 큰 위로가 됐다.
아직도 고교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는 '짬숙이'와 나를 두고 누가 더 많이 잤는가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곤 하는데, 진실은 '짬숙이'가 나를 깨워 수돗가로 데려간 적이 더 많았다.
내 인생에서 잠의 절반을 나는 그때 몰아서 잤다.
이성복의 시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읊어대며, 나 자신 몽유병환자처럼 뒹굴며
방송실로 가서 '세일링(Sailing)' 같은 음악을 틀어, 졸며 자습하던 친구들을 기절초풍시키곤 했다.
한심하고 충동적인 나라는 '사고뭉치' 옆에 순진하고 헌신적인 짬숙이가 눈비비고 깨어서 보초를 섰다.
나에 대한 '우정'에 그러했듯이 짬숙이에게 사랑은 대책 없는 ‘친절’과 동의어였다.
그 친절이 짬숙이 인생의 우왕좌왕 내비게이션이었다. 그리고 짬숙이는 살면서 대책 없이 궁색했지만,
인색한 적은 없었다. TV 한 대만 덩그러니 있던 연신내 하꼬방 신접살림에도, 잡채와 맥주로
내 생일상을 차려낸 아이였다. 스무 살 이후 태양을 향해 돌진하는 아프락사스처럼 굴다가도
일순 날개를 접고 절망의 포즈만 취했던 겁쟁이가 나였다면,
그 아이는 운명의 불꽃놀이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가끔 맞닥뜨리는 사건사고에 한숨은 쉬었지만 엄살은 피지 않았다.
불행도 행복도 배짱 좋게 받아들였다.
신경숙의 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청춘의 강을 함께 건넌 친구들의 이야기다.
나는 이 소설 제목에 큰 위로를 받았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청각을 울리는
호출의 환기성이 있어, 마치 어린 시절 동네 골목의 혼돈을 깨고 울리던 친구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이 책은 "내가 그쪽으로 갈까?"라는 프롤로그에서 시작해서 "내가 그쪽으로 갈게"라는 에필로그로 끝난다.
나에게 친구를 동사로 설명하라면 바로 그와 같았다.
“내가 그쪽으로 갈까?” “내가 그쪽으로 갈게.”
친구란 감정을 동일하게 느끼는 형용사의 상태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 '놀고' 함께 '돕는'
동사의 형태에 가깝다. 똑같이 느낄 수는 없어도, 그 옆에 같이 있어주는 거다.
*김지수의 <아프지 않은 날이 더 많을 거야>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