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주의 그대와 여는 아침

음악FM 매일 07:00-09:00
0604목 비행기 모드 버튼은 나의 탈출구가 되어 줄 수도
그대아침
2026.06.04
조회 181
비행기 모드 버튼을 누르고 온전히 번역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덕분에 끓어올랐던 화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날 저녁 번역
원고를 마무리해서 보내고 10시간 31분 만에 비행기 모드를 해제했다.

휴대폰을 들여다봤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래처의 급한 연락도 없었고,
지인들의 연락도 없었다. 다행이었지만 맥이 빠졌다. 그동안 나는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
프리랜서로 살면서 일종의 피해의식이 있었던 건 아닐까. 업체의 번역 의뢰를 거절하면
영영 일이 끊길까 봐 전전긍긍하듯이, 인간관계에서도 사람들에게 NO라고 말하면
외톨이가 될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내 상황과 마음을 돌보지 않고 미련하게 일을 꾸역꾸역 받은데다, 
사람들의 요구와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만신창이가 됐던 거다.
잠시 모든 것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 자신에게 집중을 하고 나니 지쳤던 마음이 재충전되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0시간 동안 마음의 거리두기를 한 덕분에
다시 사람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비행기 모드 버튼을 누르는 행위는 나를 힘들게 하는 일로부터 거리를 두는 동시에
상대방에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는 일종의 신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단 하루였지만, 자발적으로 외부의 모든 것과 단절된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나를 한없이
짓누르던 부담감이 사라졌다. 팬데믹 때문에 여행을 떠나기 어려워 까맣게 잊고 있던
이 비행기 모드 버튼을 방 안에서 누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비행기 안이든 방 안이든 비행기 모드 버튼이 발휘하는 힘은 강력했다.
나에게 오는 전화도 받을 수 없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연락을 할 수도 없다.
급한 연락이 오면 어떡하지라는 염려마저도 내려놓고 온전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비행기 모드 버튼은 잠시나마 모든 것과 완벽하게 단절되는 순간을 선사해 준다.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 안에서 설레는 기분으로 눌렀던 이후로,
2년 만에 마주한 비행기 모드 버튼이 나의 탈출구가 되어 주었다.
다만, 다음에는 자유롭게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그날, 휴대폰 화면에 비행기를 띄우고 싶다. 

*정재이의 <2년 만에 비행기 모드 버튼을 눌렀다>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