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맨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모르는 사이였지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한 그 순간
나는 키가 작아 앞줄에 앉고
너는 키다리.
맨 뒷줄이 네 자리
아, 우리가 어떻게
단짝이 됐을까!
키다리 친구들과 둘러서서
바람이 가만가만 만지는 포플러나무 가지처럼
두리번거리다 나를 보고
너는 싱긋 웃으며 손짓한다
너를 보면 내 코는 절로 벌름벌름
내 입은 벙글벙글.
-황인숙(1958~)
마지막 두 행이 멋지다.
“내 코는 절로 벌름벌름/내 입은 벙글벙글”이라는 표현이 재미있어,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진짜 친구를 보면 말보다 먼저 몸이 반응한다.
친한 사람들은 멀리서도 서로 알아볼 수 있다.
중학교 동창, 오랜 벗들을 만날 때 나는 제일 편하다.
내가 뭘 잘못해도 친구들은 이해한다.
얼마 전 내 생일 즈음에 우리 집에 온 친구 J로부터
“나는 널 평생 봐 왔어. 영미야. 넌 방랑자야”라는 말을 듣고
쿵, 내 속을 들켰지만 기분이 좋았다.
“난 널 평생”이라고 말해줄 사람을 옆에 둔 내 인생이 근사해 보였다.
나는 말하기를 좋아했고, 너는 들어주기를 잘했지.
어떻게 우리가 단짝이 되었을까. 우리는 짝이 될 운명이었지.
친구가 없는 인생은 얼마나 지루할까.
애인보다 친구가 그리운 나이가 되어 고백하노니,
그동안 날 참아준 친구들에게 고맙다.
너희들 덕에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시인 최영미의 시모음집 <최영미의 어떤 시_안녕 내 사랑>에서
따온 글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