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면 까닭 없이 쓸쓸해지는 기억이 있다.
무료함에 지쳐 온몸으로 방바닥을 밀고 다니던 어린 시절,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엄마의 일기장을 발견했던 날이었다.
일기장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지만 늘 눈에 띄었던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장을 보러 가고 없었다.
똑딱이는 시계 소리를 따라 가슴이 빠르게 콩닥거렸다.
몰래 보았다는 사실을 들키면 혼이 날 것 같아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엔 호기심에게 완전히 지고 말았다.
콩닥거리는 마음을 누르고 읽어본 일기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나에게도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옷에 김치 국물을 묻히고 가도 반겨주는 친구.
마른손에서 고무장갑 냄새가 나도 흉을 보지 않는 친구.
아무 때고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수더분한 친구.
나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도 못했던 내용에 화들짝 놀라 일기장을 덮었다.
원래 놓여 있던 모양이 어땠는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아무렇게나 올려놓고 나오는데 얼굴이 다 붉어졌다.
무언가 봐서는 안 되는 걸 본 것처럼, 자꾸만 가슴이 쿵쿵거렸다.
나에게도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스름한 자정 무렵에 남몰래 써넣었던,
너무나 시시콜콜해서 너무나 서늘했던 엄마의 일기.
그날 나는 엄마의 비밀을 하나 알았고 엄마도 모르는 나의 비밀을 하나 품었다.
비밀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나는
어느덧 어둑한 자정 무렵에 일기를 쓰는 어른이 되었고,
일기에도 쓰지 못하는 비밀들은 가슴에 따로 품고 삭이며 산다.
*김버금의 <당신의 사전>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