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신의 그대와 여는 아침

음악FM 매일 07:00-09:00
1126화 남기고 싶은 순간이 많은 오늘이길
그대아침
2024.11.26
조회 232

몇 해 전 그곳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던 어느 날,
승강장 건너편에서 어떤 풍경 하나를 보았다.
인천행 지하철이 서는 내 자리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한데, 
의정부행 지하철이 서는 건너편엔 초로의 노부부만이 승강장 벤치에 앉아 있었다.
가득한 것과 텅 빈 것이 그렇게 철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함께 있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는 두 승강장은 마치 다른 겨울의 온도를 지닌 것만 같았다.
아마 내가 사진을 찍는 사람이었다면 그 겨울의 풍경을 사진으로 남겨보려 했겠지만,
그것을 본 순간 나는 영화로 남기고 싶었다. 
그 공간에다 시간의 개념을 더하고, 이야기를 덧대고 싶었다.
순전히 그러한 이유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영화 한 편을 찍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며 본 그날의 사건들, 고등학교 때 땡땡이치고 하릴없이 거닐던 거리들,
동네에 있는 대학교의 낡은 건물학보사, 북촌의 골목들,
오래된 슈퍼가 있고 목련이 보기 좋게 피던 봄의 산책길들..

때로는 '어떤 공간을 남기고 싶다'라는 열망이,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다'라는 
첫 번째 이유가 되기도 한다. 내 보잘것없는 작업들이 가진 큰 의미는, 
내가 스쳐간 그 많은 순간들을 다른 방식들로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세팅되지 않은 채 거리와 그 거리의 사람들 앞에 카메라가 돌아가고, 
가끔 기막힌 우연이 그 공간에 들어오는 기적을 만난다.
나는 그렇게 그 장소의 한 시절을 영화의 방식으로 기억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서 있는 장소와 계절에 애정을 느낀다는 것, 단지 그 작은 이유만으로도
영화를 만들게 된다는 것이 작은 영화들을 만들며 내가 배운 소중함이다. 


*영화감독 김종관의 <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