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신의 그대와 여는 아침

음악FM 매일 07:00-09:00
0627목 슈베르트를 만든 '슈베르티아데'
그대아침
2024.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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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공감


슈베르트를 키운 것은 8할이 친구들이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아들이 교사가 되길 원했다.
그런데 이때 슈베르트의 편에 선 사람들이 바로 친구들이었다.
아홉 살 연상의 친구 슈파운은 어린 슈베르트를 오페라 극장에 처음 데리고 갔고,
남몰래 오선지를 사주었으며, 연주 자리를 주선하고 악보 출판을 위해서도 애를 썼다. 1816년에는 이 젊은 작곡가에게 연줄을 만들어주려고 괴테에게 장문의
추천 편지 쓰기를 자청하고 나섰다
. 비록 괴테의 응답을 받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시인 쇼버는 가출 후 갈 곳이 없던 슈베르트를 집에 재워주기도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슈베르트의 북소믈리에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쇼버포글이라는 최고의 성악가를 슈베르트에게 소개해 주었다.
다채로운 해석력으로 소문난 바리톤 포글은 자신보다 거의 30아래의
젊은 작곡가에게 금방 매료되었다
. 슈베르트에게는 화가 친구들도 많았다.
만일 그들이 없었더라면 빈의 슈베르트 박물관이자 그의 생가는
슈베르트의 유명한 안경만 달랑 전시된 아주 휑한 곳이 될 뻔했다.
평생 자기 집은커녕 자기 피아노, 자기 가구 하나를 가져보지 못한 터라
전시할 유품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슈빈트 리더. 쿠벨비저 같은
화가 친구들이 열심히 그의 얼굴을 그려준 덕에 걸어놓을 그림이라도 생겼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닌가.

이처럼 사람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친구들이 슈베르트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슈베르티아데.
한 친구의 집에 모여 슈베르트가 그들에게 자신의 곡을 들려주고,
음악과 함께 사색과 담소로 기분 좋은 저녁 시간을 보냈다.
가곡이 가정용 음악이라는 평가를 받던 시절, 슈베르티아데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선보이는 분출구의 역할을 했다
.
그들이 모여서 음악만 들은 것은 아니었다. 슈베르티아데는 독서토론회에
가까웠고 시대와 예술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오고 가는 자리였다.
음악가, 시인, 화가만이 아니라 부유한 시민도 이 모임에 힘을 보태주었다.
이처럼 다양한 사람, 다양한 예술이 한자리에 모인 슈베르티아데는
19세기 문화살롱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 ‘백상경제연구원이 펴낸 책 <퇴근길 인문학 수업>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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