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신의 그대와 여는 아침

음악FM 매일 07:00-09:00
0219수 '정리하기' 자체도 정리가 필요, 자연스럽게 해요
그대아침
202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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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해 전 겨울에 주방을 고쳤다.
공사 시작 이틀 전부터 주방의 수납장에서 그릇들을 꺼내 옮기기 시작했다.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찻잔과 상자 속에 든 찬합과 다기,
온갖 소재의 크고 작은 접시와 공기, 대접, 컵들이 있었다. 
색이 검게 변해버린 티스푼과 일회용 젓가락과 숟가락, 종이컵, 알록달록한 
냅킨들과 행주들, 이곳저곳 흩어져 있는 비닐백과 저장 용기와 유리병들,
꽃병으로 써볼까 싶어 모아둔 음료수 병들까지.
필요 없는 것들은 너무 많았고 쓸 만한 것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간단하고 심플한 삶이 인생의 모범 답안처럼 느껴졌지만,
이 정도면 되었는지 중간 점검을 할수록 버리고 싶은 물건,
정리하고 싶은 공간들이 점점 더 눈에 들어왔다.
여백이 넉넉한 공간에서 고즈넉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끝없는 정리의 압박감으로 이어졌는데, 문제는 좀처럼 끝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어느 순간 이 모든 것들이 단지 정리를 위한 정리라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라는 표어에 얽매어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리고
억지를 부리는 꼴이었다.
무질서와 혼란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였던 그동안의 일상이
어쩌면 자연스러움에 더 가까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정리해버릴 것처럼 의욕이 넘쳤던 기세가 저절로 수그러들었다.

감당할 수 있는 것만 하기로 했다. 물건이나 일 앞에서 복잡하고 피곤해질 때마다
지금 이것들이 내게 꼭 필요한가를 살폈다. '정리하기'자체도 정리가 필요했다.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과 내 두 손으로 충분히 장악할 수 있는 공간으로
하루를 채울 것을 목표로 삼았다. 
날이 저물고 계절이 오고 가듯 자연스럽게, 확실하고 명쾌하게 살 것.
'심플 라이프'보다 중요한 것은 '나답게 살기'.
주방뿐 아니라 내 의식의 한 부분까지 리모델링하는 데 열흘이 걸렸다.

*라문숙의 <깊이에 눈뜨는 시간>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