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 한껏 부풀려진 제 영혼을 위하여
그림자는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드러눕습니다.
모양과 부피가 각기 달라도
영혼의 두께는 다 같은 법이라고
모든 존재의 뒷모습을 납작하게 펼쳐놓습니다.
높이만을 최고로 알고 중력과 싸우느라 버둥거릴 때도
소리 없이 바닥으로 내려와
높을수록 커지는 위험을 길이로 재어줍니다.
알록달록한 꿈 자랑하며 휘날릴 때
화려한 빛깔들을 가장 단순한 색으로 바꿔서
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품는 쉼터가 되어 줍니다.
감당 못할 무슨 일로 풀죽은 저녁 무렵이면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며
지평선 끝까지 키를 늘이고 어깨 다독입니다.
해를 쳐다보는 동안에는 못 보지만,
방향을 조금만 돌리면 보이는 가까운 곳에서
해로 하여 가려진 세상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평생 곁에 머물러 날 지켜주다가
무덤에서 비로소 함께 사그라지는
당신, 내 영혼의 짝.
정진명 시인의 <그림자>
그림자밟기를 하며 놀던 어린시절에는
그림자가 내 얼굴만큼이나 친숙했던 거 같은데
언제부턴가 그림자를 눈여겨보지도 않게 됐습니다.
저녁 무렵이면 작은 꼬맹이의 키를
전봇대만큼 늘려 날 위로해줬던 그림자...
내 가장 친한 친구는
지금도 풀죽은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네요.